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외국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그 작가의 나라를 의식하며 읽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책의 세계에서조차 국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떤 경우는 더 부각될 때가 있다.

미겔 시후코는 필리핀 마닐라 출신의 작가다. <일루스트라도>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그 경계를 가르기 어려운 소설이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진 지 다섯 달이 지난 어느 날, 뉴욕 허드슨 강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크리스핀 살바도르의 죽음은 자살로 마무리되지만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미겔 시후코는 의문을 품는다. 그는 분명히 역사의 진실을 말하는 작품 <불타는 다리>를 쓰고 있었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원고는 사라졌으니까.

"......살바도르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끝마칠 만큼 용기가 있지도, 비겁하지도 않았다. 필리핀 문학계의 흑표범은 느닷없이 살해당했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피 묻은 촛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피 묻은 촛대는 발견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원고는 모호한 암시밖에 주지 못했다......" (14p)

<일루스트라도>의 작가 미겔 시후코는 스스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 된다. 크리스핀 살바도르의 유일한 친구이자 살바도르를 자신의 멘토로 생각했던 사람으로.

처음에는 미겔이 살바도르의 죽음 속에 감춰진 진실을 밝혀낼 줄 알았는데, 미겔이 선택한 것은 <크리스핀 살바도르 : 여덟 번의 인생을 살다>라는 전기를 쓰는 것이다. 살아 생전, 곁에서 지켜봤던 인물과 죽은 뒤에 그 인물의 살아온 흔적을 찾아가는 건 전혀 다른 일인 것 같다. 죽은 살바도르를 위해 그의 작품과 미겔이 쓴 살바도르의 전기, 그리고 미겔 자신의 이야기가 마치 퍼즐조각처럼 하나씩 맞춰져 가는 듯하다.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일생을 보면서 무의식중에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살바도르의 작품 중 <자신을 표절한 자>의 일부분을 보면서 <일루스트라도>가 곧 <자신을 표절한 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겔은 필리핀 문인들에게 살바도르의 전기를 쓴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살바도르에 대해 묻는 내용이 나온다.

리타 : "크리스핀을 죽이고 싶어한 유일한 사람은 크리스핀이야."

푸리오 : "글쎄, 이 홀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러고 싶었을 거야. 적어도 한 때는. 솔직히. <자신을 표절한 자>는 죽여줬지......"

리타 : "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하니까." (312p)

......중략

나 : "두 분은 크리스핀의 작품은 좋아하셨나요? 걸작 <당신 때문에>는 어떻습......"

푸리오 : "<다힐 사요>? 별로 독창적이지 못해. 필리핀 사람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했어."

리타 : "그 책의 문제는 새로운 것에 집착한 나머지 그야말로 진부해졌다는 거지."

푸리오 : "그래도 인정을 받으려고 애쓸 때 작품이 좋았어."

나 : "그럼 <유럽 4부작>은요?"

푸리오 : "엘리트주의지! 극도의 엘리트주의."

나 : "<형제들>은 그래도 꽤......"

리타 : "이 친구야! 그건 너무 마닐라 중심적이야."

나 : "<붉은 대지>는요?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농부들 얘기였는데."

푸리오 : "너무 지방적이지."

리타 : "게다가 너무 논쟁적이야."

나 : "<선각자들>은요?"

리타 : "거 참. 탈식민주의적 남성우월주의지."

나 : "<자신을 표절한 자>도 안 좋아하셨겠네요."

푸리오 : "그건 난 좋아했어."

리타 : "형편없으니까. 남 안 되는 걸 보는 건 깨소금 맛이거든."

푸리오 : "아닙니다, 자매님. 적당히 봐주고 한 작품은 아니야. 하지만 권력에다 대고 진실을 말할 땐 그들을 지루하게 해서는 안 돼. 적어도 그들을 웃게 만들려고 노력해야지."

리타 : "<자신을 표절한 자>의 문제는 필리핀인들을 위하기보다는 필리핀인들에 관해서 썼다는 거였지."

푸리오 : "미국인들은 좋아하고 필리핀인들은 싫어할 책이지. 우린 우리 동포들을 위해서 써야 돼."

리타 : "여자 동포들 포함." (312p~314p)

크리스핀 살바도르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또한 그의 작품은 필리핀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소설은 살바도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죽음으로 인해 살바도르는 새롭게 태어난다. 조국 필리핀은 살바도르가 그저 세상에서 제일 눈에 띄는 필리핀 작가가 아니라 좀 더 제대로 필리핀적인 작가이길 바랐지만 살바도르는 동조하지 않았다. 전설이 된 <불타는 다리> 원고는 어디에 있을까?

텅 빈 박스, 사라진 것은 사라지지 않은 것의 윤곽을 짐작케 해준다는 말.

그 텅 빔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 전체가, 삶이 어떻게 끝이 났고, 우리 각자는 그렇게 끝이 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남겨 있다는 말.

<일루스트라도>는 필리핀 작가 미겔 시후코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는 자신의 의지대로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그 글이 한 권의 책이 되었을 때는 새로운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하는 것 같다. <일루스트라도>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미겔 시후코와 크리스핀 살바도르이 함께 녹아든다. 필리핀적인 작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삶과 깨달음에 대하여.

죽음의 미스터리로 시작해서 삶의 미로를 헤매다가 돌아온 느낌이다. 아, 현기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