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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1984년 베를린, 내 나이 스물여섯 살.
<모멘트> 제2부 제1장 첫 구절이다. 베를린 장벽이 존재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남자가 있다. 25년 전에 자신이 쓴 원고를 꺼내든 이 남자의 이름은 토마스 네스비트. 중년이 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눈에 끌리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을까. 소설처럼 아름다운 묘사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있다고 믿고 싶다. 진실한 사랑은 인생의 참의미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이 없는 인생은 공허한 것이 아닐까. 운명적인 짝을 만나는 행운과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삶은 찬란한 축복인 것을. 그러나 인생이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순간이 늘 존재한다.
이 소설은 참 묘한 매력이 있다. 평범할 것 같은 사랑 이야기에서 분단된 조국과 공산체제의 비극적 참상이 더해져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주인공 토마스는 25년 전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지만 그녀의 배신으로 크나큰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에게 진실한 사랑은 한 번뿐이었기에 그 이후의 인생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방랑자의 삶이었다.
"......기억은 정말이지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뜻밖의 소포가 도착하고, 과거가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추억과 그 부스러기들이 들쑥날쑥 떠오른다. 그러나 들쑥날쑥한 기억이란 애당초 없다. 그것이 기억에 대한 절대적인 진실이다. 추억과 그 부스러기들은 어떻게든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모두에는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 중 스스로 인정하는 사연 하나를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라 부른다." (33p)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의 구분은 남녀 간의 차이일뿐 결론적으로는 운명적 사랑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운명적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남자는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후회하며 살았지만 여자는 그 사랑을 끝까지 믿었다.
만약 토마스가 소포를 받지 못했다면 진실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소포에는 그가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 페트라 두스만의 노트가 들어 있다. 그 노트를 읽는 순간, 베를린 장벽처럼 토마스가 페트라에게 쌓았던 마음의 벽이 무너져내린다. 그는 왜 그녀의 진실을 들으려하지 않았을까. 왜 그녀는 진작에 진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일까. 조금은 허망한 기분이 든다. 정말 운명적 사랑이라고 확신했다면 남자는 약간의 의심도 허용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는 페트라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엄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라는 이유로 그녀가 참고 견뎌야 했던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페트라의 노트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건 시대적 비극 때문이다. 그녀가 살았던 동독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무엇을 믿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와 자유로운 미국인 토마스가 사랑했으니 어떻게 해피엔딩을 기대하겠는가. 아무리 운명적 사랑이라도 시대적 비극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을 탓해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순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순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얻을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순간." (592p)
<모멘트>에는 우리의 순간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