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놀이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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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역사는 恨과 함께 흘러간다. 피비린내나는 전쟁 없는 역사란 없겠지만 그 전쟁이 먼 이웃 나라의 침략도 아니요, 바로 얼굴 맞대고 살던 한 민족끼리의 대립이라면....... 이러한 우리의 근현대사의 모습은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한 편의 소설만큼이나 먼 얘기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역사적 아픔, 갈등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와 닿는 느낌이었다.

주인공 황복만과 배점수는 동일한 인물이다. 만약 갑작스런 전화 한 통만 없었다면 그냥 묻고 외면했을 과거가 드러난다. 현재 별 걱정없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황복만에게 감추고 싶은 과거의 비밀은 무엇일까? 같은 시기에 황복만의 장남 형민도 전화를 받게 되고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숨기고 감추면 그만일 과거가 누구에게는 평생의 恨이 되고마는 과거라면 무엇이 최선의 해결일까?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전화를 건 당사자의 의도가 복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가 겪은 고통의 세월을 생각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단순한 아픔으로 치부하기엔 그 진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자식된 도리로써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의 과거가 자식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겠느냐는 문제는 우리의 역사의식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부모의 과거를 모른다고 해서 현재 우리의 삶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모의 삶을 모르고서 과연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와 자신의 삶은 별개인 듯 보이지만 살다보면 유기적으로 연결된 듯 느껴질 때가 많다. 역사란 결국 이러한 개인의 삶이 모여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민족이 지닌 역사적 恨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민족상잔의 비극을 이야기한들 현대 젊은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방관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그 비극이 바로 자신의 부모님이 겪은 삶이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온전히 공감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비극의 전말을 보면서 인간적인 슬픔을 느꼈다.

황복만이라는 인물은 얼핏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에 그는 배점수였고 그가 저지른 악행은 이미 많은 이들의 삶을 짓밟았다. 그가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해도 지울 수 있는 과거는 아니다. 누가 그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역사 속 비극은 청산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도 힘든 일인데 거짓으로 선량한 척 꾸미고 자신의 잘못을 덮어버리니 원한만이 쌓여가는 것 같다. 중요한 건 쌓인 한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현명한 이들에 의해서 제대로 설 수 있다.

배점수의 양심을 자극하여 과거를 돌아보게 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한 행동은 일반적인 복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신이 당한만큼 되갚는 식의 복수였다면 분명 황복만의 장남 형민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감춰져 있던 진실을 드러내는 일, 딱 거기까지였다. 어떻게 보상하라던가, 반성하라는 식의 조건을 달았다면 그토록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걱정없이 노후를 풍요롭게 즐기던 황복만에게 과거의 진실은 청천벽력처럼 느껴졌겠지만 세상에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그가 두려움과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돈으로 해결하려는 비열한 면모를 보이지만 그렇게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 그의 과거는 장남인 형민에게 전해지고 평생의 업보처럼 짊어져야 한다. 버려진 아들 칠성이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없는 것처럼 과거는 숨기고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불놀이>는 우리의 역사적 비극을 생생한 삶의 이야기로 끌어내어 아픔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우리 민족의 이야기이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란 걸 상기시킨다.

 

" 배점수 씨, 저 시퍼렇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시오. 그리고 저 속에서 맥을 못 쓰고 녹아내리는 쇠를 보시오. 바로 저것이오. 양반이니 지주니 하는 것들은 저 쇠붙이고 우리는 저 쇠붙이를 맘대로 녹여 버릴 수 있는 불꽃이오." (28p)

 - 불꽃은 강하게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그러나 정작 인간으로서의 본질까지 녹여버려서는 안 된다는 걸 배점수는 몰랐던 것이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는 것은 정의롭지만 복수는 또다른 불의와 죄악의 시작이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건 그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외로움이란 것의 진짜 얼굴을 비로소 정확하게 보는 것 같았다. 모든 것과 함께 있으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된 상태, 모든 것은 평상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혼자만 흩어지고 부서지는 무질서의 혼돈을 겪으면서 한사코 정상인 체 꾸며야 하는 고통. 그는 오로지 혼자라는 사실을 여태껏 이처럼 절박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94p)

- 왜 그가 배점수에게 전화로만 소통했는지 알 것 같다. 그가 거짓된 황복만으로 살면서 잊었던 '배점수'를 기억하는 순간, 그는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양심이 무엇인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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