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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박찬욱 외 지음 / 그책 / 2009년 4월
평점 :
#1 금기를 향한 욕망
아담과 이브는 왜 선악과를 따 먹었을까?
종교는 인간의 원죄로부터 시작된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한 신의 영역을 넘보면서 죄를 저지르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된다. 인간이 불완전함을 깨닫는 순간, 신을 향한 두려움과 온전한 신앙심이 생겨난다. 죄악은 금기를 향한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박쥐>는 금기를 깨뜨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인간의 상상력은 불가능이 없다. 오히려 금기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밀한 유혹인 것이다.
<박쥐>의 주인공은 성직자이면서 흡혈귀가 된 현상현 신부다. 왜 하필 성직자를 주인공으로 선택했을까?
성직자는 평생 신의 사명을 따르는 사람이다. 고백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지만 신의 뜻을 따르기로 서약했기 때문에 그는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런데 바로 그런 신부가 흡혈귀가 된 것이다. 마치 천사가 악마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루시퍼를 떠올리게 한다. 한순간에 악마가 되어버린 천사는 더 이상 천사가 아니다.
흡혈귀가 된 덕분에 치명적인 이브 바이러스를 이겨낸 상현은 선과 악의 대립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저 높은 곳에 천국이 있고, 아득히 낮은 곳에 지옥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쯤 위치한 것일까?
금기를 깨뜨린다는 건 추락을 의미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추락할 줄 알면서도 금기를 향한 욕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당신을 안고 내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이란 바로 이런 거예요. 나락으로 내려갈 수는 있어도 높은 곳으로 다시 올라갈 수는 없는 것.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면, 당신을 여기 두고, 거미처럼 겨우 겨우 기어서, 손톱을 세워 벽을 할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가야만 하죠. 나 혼자서. " (98p)
상현은 혼자서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태주와 함께 나락으로 내려간다. 아담은 이브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국 아담의 선택인 것이다.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감정이면서 동시에 죄악을 저지르는 욕망인지도 모른다.가톨릭 신부인 상현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의무지만,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은 죄악이다. 금기를 깨뜨린 순간 욕망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사랑과 욕망 사이를 오가는 박쥐......
#2 꽃들에게 희망을
아직 영화를 못 봤지만 상현 역을 맡은 배우 송강호의 파격적 영상에 대해 들었다.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보다 배우가 보여주는 이미지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이 유감스럽다. 이것이 책과 영화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안 본 채로 영화를 봤더라면 인간의 욕망이니 죄악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전 영화 <원초적 본능>이 생각난다. 섹스와 살인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여인과 그녀를 사랑하게 된 형사의 이야기가 그저 야한 영상으로 기억된다. 관객 역시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 탓이다.
하지만 <박쥐>라는 영화는 그 이상이었으면 좋겠다. 성직자라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흡혈귀가 된 상현을 통해 원초적 본능을 보여 주는 것은 추락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누구나 추락할 수 있다. 욕망을 지닌 인간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무조건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는 수많은 애벌레들보다, 우리는 땅으로 내려온 애벌레를 통해 배우게 된다. 추락은 절망도, 끝도 아니다.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의지, 그것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