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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ㅣ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면 거의 절반은 입이 불쑥 튀어나온 심통 낸 표정이다. 이유인즉슨 나들이를 나서면 엄마와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둘 뿐인데 우리 집은 형제가 셋이니 늘 밀리는 것은 나였기 때문이다. 형제간에 우애가 안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도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운명적인 라이벌 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일인데 그 때는, 형제간의 상징적인 우위 다툼에서 밀렸으니 꽤 마음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유치한 자리다툼보다는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낫다는 걸 알게 됐다.
21세기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 책을 읽으며 실감했다. 또한 권력의 어둔 이면을 통해 우리 역사의 진실과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왕이 못된 세자들>은 조선 왕조에서 불행했던 세자들의 이야기다. 조선 왕조의 세자는 모두 27명이며 그 중 12명의 세자가 왕이 못 된 채 죽었다. 왕이 되어야 할 운명을 지닌 세자가 왕이 될 수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권력은 치명적인 칼날과 같다. 칼자루를 쥐지 못하면 칼을 쥘 수밖에 없다. 왕이라는 최고 권력에서 밀려난 이들의 냉혹한 운명을 보여준다.
조선의 역사는 시초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최초의 세자였던 이방석은 자신의 형이자 태종이 된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태조 이성계가, 맏이도 아니고 건국 과정의 공로도 없는 막내아들 이방원을 세자로 선택한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권력은 지킬 수 있는 자에게 승계되어야 한다. 치열하게 투쟁하여 권력을 거머쥔 이성계가 사사로운 정으로 세자를 정했으니 결과는 자명하다.
자신보다 똑똑한 동생을 위해 왕위를 양보했다는 양녕대군의 일화는 역사적 진실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정말 순순히 권력을 양보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역사가 되었을까? 하지만 권력의 유혹은 강렬하고 치명적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소현 세자 이왕은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여 청나라에 8년 간 볼모살이를 하고 돌아오지만 환영은커녕 냉대를 받으며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한다.
사도세자 이선은 역사 드라마의 단골메뉴로 뽑힐 만큼 일생이 극적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최고 권력을 갖고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의경세자 이장, 순회세자 이부, 효장세자 이행, 문효세자 이향, 효명세자 이영.
이들은 권력다툼과는 무관하게 병사한 경우다. 그러나 세자로서의 막중한 책임과 의무로 건강을 지키지 못했다면 이들 역시 권력의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폐세자 이황과 이질은 각각 아버지인 연산군과 광해군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세자 이은, 영친왕은 우리의 슬픈 역사를 대변한다. 당당히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면서도 일본 황실과의 혼인으로 양국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불운의 왕이다. 그 뒤를 잇는 이진, 이구는 친일 왕족이기에 온전히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암울하게 만든 원인은 아니었을까?
역사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듯 아프다. 일본에게 무참히 짓밟혔다고 해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의 왕녀와 혼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 제 28대 왕이 될 수 없다면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왕이 못된 세자들>은 우리 역사 속 한(恨)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풀 사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