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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최근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로드>라는 코맥 매카시의 작품에 대해 익히 들어 왔으나 막상 읽지는 못했다. 입 소문이 나기 시작한 작가인지라 관심은 있었으나 왠지 작품의 무게감이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한 것 같다. 그런데 <핏빛 자오선>은 1985년 발표되어 이미 <타임>이 뽑은 100대 영문소설로 선정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4대 소설가로 손꼽히는 코맥 매카시라서 그런지 첫 만남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같다.
일단 내게는 그리 쉽지 않은 만남이었음을 고백한다. 이 소설은 19세기 미국과 멕시코 간의 치열했던 영토 분쟁과 이후의 국경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국 군대의 횡포와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가 보는 사람까지 절망으로 이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보니 다수의 등장인물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 쓴 것이라 한다.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는 이런 작가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열 네 살의 소년이 가출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대의 아픔이라고 해야 될 지 아니면 단순히 개인의 불행이라 해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더 거칠고 야만적인 세상을 향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여기서부터 소년을 쫓는 일이 힘겹게 느껴진다. 온통 피로 물든 폭력과 굶주림, 고통을 겪으며 성장한 소년은 생존을 위해 입대한다. 소년이 만나는 그린 목사, 머리 가죽 사냥꾼 글랜턴, 화이트 대위, 홀든 판사, 전직 신부 토빈은 공허와 절망이 난무하는 현실을 나름의 논리로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어떤 논리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늙고 병든 메노파 노인만이 진실을 말한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들어 있지. 인간들 앞에서 100만 년이나 잠들어 있지만, 그것을 깨울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네. 지옥이 다 차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 내 말 잘 듣게. 남의 나라 땅에까지 가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친 짓이야. 그래 봤자 세상만 더 시끄러워질 뿐이지.” (63p)
소년은 나이답지 않은 힘겨운 삶을 버티며 살아나려고 애쓴다. 살아 숨쉰다는 것, 그것만이 소년에게는 희망이지 않을까? 핏빛 자오선은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혼란스러운 세상을 보여준다. 생존과 욕망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결코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 그야말로 희망인지도 모른다.
지독한 소설이다. 마지막까지 묵직한 여운을 남기니 말이다.
헛소리라고 치부했던 판사의 말도 어쩌면 혼란한 세상에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 자신의 논리대로 살 수 없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았을까?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삶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지, 각자의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낯선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엔 내 안의 세계가 좁은 것 같다. 공감하기 보다는 들여다봤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판사가 말했다.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지. 자기 운명을 알고서 일부러 반대의 길을 택한 자들도 결국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운명을 맞게 되네. 운명이란 이곳 세계만큼이나 거대하여 반항자까지도 다 품고 있거든. 너무나 많은 이들이 파멸하고 만 이곳 사막은 너무도 광대하여 우리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지. 황량한 불모지일 뿐이야. 사실상 거대한 돌덩어리지.” (42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