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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섹스칼럼니스트의 사랑방정식
김경순 지음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21>이란 단순한 숫자에 그런 의미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기야 남녀 간의 은밀한 연애담을 들여다보면 그들만의 비밀이 어디 한 두 가지겠는가?
순진하다고 말하기엔 나이가 있고, 내숭이라 하기엔 그럴 이유가 없는데 괜히 상상을 하니 야한 것 같다. 그렇다고 음흉한 미소를 띠며 몰래 볼 책은 아니다.
“맥주 병뚜껑이 톱니가 몇 개인지 알아?”
“모르겠는데. 술마다 다른 거 아냐?”
“전 세계 공통으로 21개야. 21 하면 뭐가 떠올라?” (53p)
사실 아무 생각이 안 떠올라도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상황이다. 사랑하는 남녀 간의 대화란 내용보다는 분위기에 좌우되니까.
이 소설 역시 분위기로 따지자면 유쾌 발랄하다. 요즘은 칙릿이 대세인 듯싶다. 하긴 연애에 혈안이 된 젊은 사람들에게 삶의 철학을 논하기 보다는 연애 철학을 논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인생을 무겁고 깊이 있게 사는 것만이 잘 사는 건 아니니까.
‘멋진 사랑’을 꿈꾸는 20~30대들을 위해서 이런 발칙하고도 발랄한 사랑 이야기가 있음을 들려 주기 위하여 작가는 무지개 만나는 꿈을 꾸었나 보다.
그렇다. ‘뭐 이런 경우가 있어?’라고 따지지 말자. 소설은 소설일 뿐이니 그저 알록달록 무지개 꿈을 꾸었나 보다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동생의 애인을 뺏는 언니가 주인공이라고 말하면 김 빠진 맥주가 되려나?
맥주 병뚜껑을 열었으니 얼른 마시길 바란다. (괜히 톱니가 몇 개인지 세느라 분위기 깨는 사람은 없겠지.) 이 정도 줄거리를 알았다고 해서 이야기의 재미가 줄지는 않는다. 아니, 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의 매력은 현실감이 뚝뚝 떨어지는 솔직한 표현에 있다.
서른 세 살에 섹스 칼럼을 쓰는 언니 – 명색이 섹스 칼럼을 쓰면서 전혀 야한 구석이라고는 찾아 보기 힘들다. 그녀가 주인공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정말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잡지 혹은 신문에 실리는 섹스 칼럼을 보며 도대체 누가 이런 글을 쓸까 상상했는데 그녀의 실체를 보니 조금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명색이 섹스 칼럼니스트면서 본인은 제대로 된 사랑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굳세어라 금순아’ 타입이다. 본인은 힘들어도 주변은 즐겁다. 둔한 듯 하면서도 챙길 건 챙긴다.
브래지어 디자인을 하는 동생 – 의상디자인학과를 나와 고고한 이상을 꿈꿨으나 브래지어 디자인으로 현실과 타협한 그녀는 언니와 달리 외모며, 몸매가 멋지다. 분명 피를 나눈 친자매인데 전혀 유전적 동일성을 찾기 힘들다. 성격 또한 극과 극이다. 야무진 듯 하면서도 폼생폼사 철없어 보인다. 그래도 현실감각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한 지붕 아래 전혀 다른 두 자매가 동거하고 있으니 조용한 날이 없는 건 당연지사다.
세상의 모든 곳에 신이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면, 세상에 악마가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동생을 만들었을 것이다. (39p)
이 구절을 읽으면서 혼자 키득거렸다. 철들고 나서야 형제 자매의 소중함을 알지, 철 없을 때는 원수가 따로 없다. 그녀들의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실은 자매 간의 일상이 더 흥미진진한 것 같다.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누군가와의 연애를 꿈꾸기 전에 가족을 먼저 떠올려 보면 어떨까? 원수 같던 동생이 혹은 언니가 갑자기 사랑스러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철이 든다. 매달 21일은 가족과 함께 하는 날로 정하면 어떨까?
내 맘대로 과감한 성 이야기에서 따스한 가족 사랑으로 마무리 지어본다. 어찌됐건 따끈 혹은 후끈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