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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사랑 ㅣ 판타 빌리지
리처드 매드슨 지음, 김민혜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시간여행을 다룬 소재라고 해서 판타지문학이라 부른다면 독자들 입장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다. 내게 있어서 판타지문학은, 뭔가 기발하고 톡톡 튀는 느낌의 작품일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판타지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굳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 같아 멋쩍지만 내 느낌이 그렇다. 이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의 기록이다. 액자소설처럼 주인공 리차드의 형인 로버트 콜리어가 책의 서문을 썼다. 자신의 동생이 남긴 글을 믿을 수는 없지만 훌륭한 작가라는 점과 리처드 자신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허구가 아니란 점은 믿는다고 말한다. 또한 본인 의도는 아니지만 원고 첫 부분의 지루하고 장황한 부분은 과감히 쳐냈음을 알려준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건 한 남자가 주인공이며 그가 모든 글을 적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판타지에 기대를 걸고 신나는 시간여행을 떠올리면 금새 실망할 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탄다거나 특별한 초능력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면 좋겠지만 리차드의 시간여행은 보는 사람마저 지치게 할 정도로 힘들다.
서른여섯 살, TV작가였던 리차드 콜리어는 수술이 불가능한 측두엽 종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인 것이다. 남은 삶을 정리하기 위해 치료를 포기하고 여행을 떠난다. 우연히 머물게 된 코로나도 호텔에서 유명 여배우 엘리스 매케나의 사진을 보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다만 그녀는 이미 죽은 1890년대 사람이다.
그녀를 만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시간여행뿐이다.
리차드가 어떻게 시간여행을 가능하다고 여겼는지는 알 수 없다. 오로지 사랑의 힘으로 75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은 것이다. 1971년 현재가 아닌 1896년에 존재하는 자신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일이 전부다. 그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원래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 이야기를 듣자면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어떻게 만났고 사랑했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지만 당사자는 세세한 감정과 주변 묘사만으로도 할 말이 넘치기 때문이다. 사랑은 멀쩡한 사람을 수다쟁이로 만드는 모양이다.
이 작품은 영화 <사랑의 은하수>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책의 원래 제목은 ‘시간이여 돌아오라(Bid Time Return)’이지만 나중에는 책과 영화 제목이 ‘Somewhere in Time’가 되었다.
정말 읽다 보면 영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되는 작품이다.
또한 왜 작가 리처드 매드슨이 “내가 쓴 작품 중에 가장 최고다!”란 말을 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아마도 작가의 진실된 내면을 가장 잘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그는 여행 중 들른 극장에서 우연히 옛 여배우의 사진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 책 여주인공의 실존 인물은 모드 애덤스(Maude Adams)라는 미국 여배우다. 직접 만나서 첫눈에 반하는 경우는 봤지만 사진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건 특별한 경험인 것 같다. 특히 그 상황을 더욱 극적이게 만드는 요인은 두 사람이 75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떨어져 있다는 것과 남자에겐 그나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애절한 사랑에 매달리는 한 남자의 모습이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억울해서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환각을 통한 자기만족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리차드가 만난 운명의 여인 엘리스를 보는 순간, 모든 게 진실이기를 바랬다.
우리는 누구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한 리처드 콜리어의 이야기는 우리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시간의 흐름이 어찌되었건 지금 이 순간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확인하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