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인간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조경수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심각하게 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분명 처음에는 흥미로운 의학소설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심각해지는 이유는 뭘까?

이 소설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몰입해서 이 지경이 된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생각의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다.  

뇌사 상태의 열 여덟 살 대학생의 몸과 두 팔을 잃고 전신 화상을 입은 서른 두 살 화가의 머리를 합치는 세계 최초의 전뇌 이식 수술이 벌어진다. 이름 또한 기가 막힌 프로메테우스 재단은 독일의 대규모 사립병원으로 모든 종류의 이식 수술을 전문으로 한다.

현대 의학의 발전은 일반인들에게 지나친 희망을 품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거부하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니 말이다. 이 부분이 내게는 윤리적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생명을 얻는 사람이 있으면 포기해야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장기이식이 당연한 일로 여겨질수록 한 편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바랄 수 밖에 없다. 각자가 어느 입장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상황이 내게는 끔찍스럽다. 뇌사 상태의 아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 두 팔을 잃은 화가의 비극이 만나 21세기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괴물의 대명사지만 원작에서는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이다. 현대판 프랑켄슈타인은 공포스러운 괴물이 아닌,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지닌다.

아름답고 완벽하다면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완벽이란 말은 지극히 주관적인 의미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기준이 되곤 한다.

두 사람의 온전한 머리와 몸을 합쳐 한 사람을 만드는 일, 걸작 인간의 탄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머리인가, 몸인가?

머리와 몸을 구분 짓는다는 것이 매우 황당한 일이지만 서로 다른 머리와 몸이 합쳐진 경우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황장군은 미단 공주의 눈 앞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목을 베어버린다. 잔인한 이 장면에서 미단 공주는 사랑하는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끌어안겠는가? 기분 나쁜 상상이긴 하지만 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걸작 인간이 지닌 모순이며 갈등이다.

여기에서 걸작 인간을 탄생시킨 중요한 인물, 레나 마리아 크라프트라는 의사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고뇌는 의사로서의 냉철함을 벗어난다. 이성의 가면을 벗고 본능을 깨닫는 과정 속에서 그녀 자신이 새로운 삶을 찾게 된다.

전뇌 이식 수술을 결정하면서 레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뒤바뀐 머리들>을 떠올린다. 옛 인도의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 시타는 실수로 두 남자의 머리를 바꿔 붙인다. 잠재된 욕망이 그녀로 하여금 이상적인 남편을 창조해낸 것이다.

 

상이함은 비교를 낳고, 비교는 경탄을 낳지만, 경탄은 교환과 결합에의 갈망을 낳는다. 각자의 단일체에서 핵심이었던 것이 결합하여 모든 소망을 충족시키는 새로운 단일체를 형성했다.  (106p)

 

그러나 현실은 소설처럼 단순하지 않다. 여주인공이 창조해낸 남편은 이상이 아닌 허상이다. 바꿔야 될 것은 여주인공 자신이 아닐까?

<걸작 인간>은 의학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여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인간의 순수한 영혼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찌 보면 뻔한 결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고 나한테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행복이 뭔가요? 아니, 이런 날에는 그런 질문을 해도 돼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하고 싶어요. 그는 행복하다는 것은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지요.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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