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최근에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를 읽었다. 신경과 전문의로서 그가 만난 다양한 환자들에 관한 글을 보며 라는 미지의 세계를 조금 엿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태도가 한결같이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것에 감동받았다.

바로 그가 서문을 쓴 이 책은 루리야 박사에 대해 낭만주의 과학자라고 표현한다. 살아있는 존재를 분해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을 지닌 과학자라는 것이다. 루리야 박사의 연구는 단편적인 실험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전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제껏 어떤 학자도 30년에 걸친 장기간의 사례 기록을 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따뜻한 인간애를 지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루리야 박사와 이 책의 주인공인 자세츠키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자세츠키는 1942년 폭탄 파편을 맞아 좌측 두정 후두부가 크게 다쳐 뇌 손상을 입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한 남자가 뇌 손상으로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해 본인이 적은 글과 루리야 박사의 의학적 설명이 함께 적혀있다.

자세츠키의 외상은 치료됐지만 대뇌피질의 손상은 영구적인 상처를 남겼다. 자세츠키는 말한다. 1942년 자세츠키는 죽었다고. 뇌 손상으로 자신이 기억하며 알고 있던 모든 지적 능력이 송두리째 사라진 그는 낯선 남자로서 남은 생을 살아간다. 원래 그는 이 책의 제목을 <끝나지 않은 나의 싸움>이라고 짓고 싶어했지만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가 되었다.

그는 단순히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언어능력과 기억력이 모두 파괴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고 단어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 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원래 기억들을 찾고자 한다. 박사의 충고대로 무의식 중에 글쓰기를 시도하여 과거의 기억이나 생각들을 적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적은 글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자세츠키의 삶은 지나간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한 끝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단지 원래의 자신이 누군지를 찾고 싶은 한 남자는 고통스런 삶을 매일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의 증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세츠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다.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일반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뇌 손상이 이토록 치명적인 장애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자기자신이라고 확신하는 모든 특징들은 결국 가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다양한 성격과 능력을 지닌 한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은 건강한 가 있어서 가능하다.

루리야 박사와 자세츠키는 이 책을 통해 일반인들도 뇌 손상 환자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인간 본질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자세츠키는 평생 뇌 손상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겠지만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의 용기야말로 가장 인간다움을 드러낸 것이리라.

루리야 박사는 마지막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전쟁이 없다면……?

심각한 뇌 손상 환자들이 생겨났던 것은 비극의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때문이었다. 장래가 촉망 받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 순간에 부상 당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뇌 손상으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자세츠키처럼 불행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없다면 인류는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이라는 루리야 박사의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인간의 생명과 본질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인류에게 희망이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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