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저녁놀 지는 마을 어귀에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놀고 있다. 어느 집에선가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흘러나오고 곧이어 제 아이를 부르는 엄마들의 외침이 들린다. 호명된 아이들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나 둘 제 집으로 들어간다.

저녁놀 지는 풍경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데도 유독 저녁놀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간다. 그 때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라 대수롭지 않았지만 나이 들어 생각하니 무척 특별한 의식처럼 느껴진다. 소중한 나의 집으로 초대받는 기분이다.

저녁놀은 집으로 향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어느 곳에 나와 있든지 그 때가 되면 모두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붉은 노을이 이부자리를 펴듯이 하늘을 물들이면 각자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 곳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저녁놀 지는 마을>의 이야기는 짧으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저녁놀 같다. 그리고 앞서 장황한 감상을 늘어놓게 할 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열 살 소년 가즈시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며 화자다. 소년에게 아빠는 뺀질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뿐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엄마와 내가 사는 아파트에 짱구영감이 나타난다. 짱구영감은 엄마의 아빠, 즉 외할아버지다. 꼬질꼬질 노숙자 몰골로 등장한 짱구영감과의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대충 이런 이야기라고 말하면, 별 시시한 얘기겠구나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니란 뜻이다. 단지 제목만으로 나를 감상에 젖게 만들었듯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가 나를 잡아 끈다.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잠시만 내 얘기를 들어주겠냐고 말하는 사람처럼 이 책은 참 얇기도 하다. 그냥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짱구영감에게 정이 든 것 같다. 정말 짱구영감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닮았다. 불쑥 찾아와서 떡 하니 자기 자리를 꿰어 차고는 원래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밀어내고 싶어도 차마 밀어낼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은 가족을 흔히 피붙이라고 표현한다. 끈끈하게 피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다가도 저녁놀처럼 인생에 어느 시점이 되면 저절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 내 가족, 나의 집으로 말이다.

엄마와 짱구영감의 관계는 미묘하다. 애증이 뒤범벅되어 열 살 소년에게는 헷갈린다. 엄마에게 있어서 짱구영감은 과거의 아픔을 떠올리게 만드는 흉터다. 이미 내 살처럼 자리잡은 흉터다. 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내 일부가 된 것이다. 깨끗하게 새 살이 돋은 상처였다면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흉터를 남긴 상처는 평생 기억된다.

가족이란 존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때론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어찌됐건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가족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한 지붕 아래 사는 일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긴다면 당신은 무척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은 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한 듯 여기는 일상에 숨어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행복을 찾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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