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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평점 :
머리 속이 폐허가 된 것 같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감의 실체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주인공들이 경험한 공포감의 정도를 대변하는 듯 하다. 실제 시간은 겨우 며칠이지만 공포와 맞서고 있는 이들에게는 수 십 년 혹은 수 백 년처럼 기나긴 시간일 것이다.
내게 공포감이란 두 시간 정도의 공포 영화나 몇 십 분 정도의 롤로코스터를 탈 때의 경험이 전부다. 비교적 안정되고 평온한 삶을 추구하다 보니 공포감은 일종의 오락 정도로 여겨진다. 무료한 일상을 자극하는 짜릿한 전율로 잠깐이면 충분하다. 실제로 내 삶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가 배제된 안전지대에서 경험하는 공포감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책 속에서의 공포는 상상만으로도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드는 위력을 지닌다.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극도의 공포를 경험할 때 어떤 행동을 할 지에 대한 인간 실험을 보는 것 같다. 20대 초반의 청춘들은 각자 개성이 있다. 제프는 매우 이성적이어서 위기의 순간에 리더십을 발휘하여 상황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성격이다. 나쁘게 말하면 독재자형이다. 에이미는 귀엽고 애교 있는 편이지만 때론 투덜대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연약한 여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에릭은 소심하면서도 낙천적이며 우유부단한 남자라 할 수 있다. 스테이시는 활달하며 다소 낭만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분위기에 휩쓸리는 편이라 자제력이 부족해 보일 수 있으나 원만한 성격이다. 제프와 에이미는 연인 사이, 에이미와 스테이시는 절친한 친구 사이, 스테이시와 에릭은 연인 사이다. 이들 네 사람은 3주간의 멕시코 여행을 하게 된다. 그 곳에서 만난 독일인 청년 마티아스는 친절하고 편안한 성격이다. 우연히 어울리게 된 그리스 청년 세 사람은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실제 이름을 몰라 그저 돈키호테, 후안, 파블로라고 부른다.
휴가지에서의 나른한 권태감을 느낄 무렵에 마티아스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동생이 무작정 고고학팀원인 여성을 좇아갔으니 함께 찾으러 가달라는 것이다. 일종의 호기심과 모험심이 자극된 제프는 가기로 결정한다. 제프의 독단적인 결정에 나머지 3명은 어쩔 수 없이 동행하고 그리스 청년 중 한 명인 파블로는 놀러 가는 줄 알고 신나서 따라 나선다. 돈키호테와 후안에게 좇아 오라는 메모까지 남기고 말이다. 말이 안 통하는데 뭘 믿고 좇아간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어쩌면 파블로의 무모한 동행이 공포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요소인지도 모른다.
이들 다섯 명이 찾아간 곳은 마야의 촌락으로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고 있는 폐허다. 신비로운 마야의 촌락을 배경으로 영화 <인디아나 존스>처럼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였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이들의 모험은 하나의 공포 실험이 되고 만다.
공포감을 주는 실체가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실체를 안다고 해서 공포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들은 결국 깨닫는다. 벗어날 수 없는 공포 속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폐허>가 보여 주는 공포는 잔인한 고문과도 같다. 읽는 사람마저 무기력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느끼게 될 것이다.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가장 큰 공포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