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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방황하는 칼날은 무엇인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인간의 죄와 벌을 공평하게 다루고자 두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많은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낸다.
정의의 상징은 한낱 이상이 아닐까? 이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는 것일까?
이 책은 정의의 실체를 고민하게 만든다. 다음의 사건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판단을 할까?
십 대 소녀가 집으로 가는 도중 괴한에게 납치되어 강간을 당한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들은 이미 여러 번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범인에게 가장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문제는 그 범인이 순진한 얼굴을 한 십 대 소년일 때이다. 법은 미성년자에게는 관대한 처벌을 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갱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살인죄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동일한 저울을 쓰지만 현실 속에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내가 가해자의 부모라면 비록 못난 자식이라도 보호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반면 피해자의 부모라면 가해자를 죽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상황들은 정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피해자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을 잃은 심정은 엄청난 고통일 것이다. 참혹한 범죄의 희생자였던 딸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복수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복수를 위해 가해자를 살인한 경우는 어떠한가?
이 책은 읽는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한다.
복수하고 싶은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실제로 복수를 위해 살인을 용납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 그저 소설이나 영화였으면 좋겠다.
최근에 영화 <세븐 데이즈>를 봤다. 실력 있는 변호사의 딸이 납치된다. 납치범의 요구는 돈이 아니라 사형 선고가 확실한 강간, 살인범이 무죄 석방되도록 변호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서 파렴치한 범죄자를 풀려나게 해야 한다. 양심상 해서는 안 되는 변호지만 딸의 목숨이 다급한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누가 이런 끔찍한 세상에 책임이 있는가?
사회의 마비된 양심은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에 상처를 내고 있다. 천사 같이 순수한 아이들이 사악한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른들은 부정한다.
“ 우리 애는 착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나쁜 친구들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요.”
세상은 정의를 제멋대로 이분법하고 있다. 나는 괜찮아도 너는 안 되고, 우리만 괜찮으면 너희들이 어떻든 상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의 정의가 세상을 무섭고 각박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방황하는 칼날>은 나랑 상관 없는 범죄 사건 이야기가 아니었다.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접하는 범죄 사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상처 입은 이들은 우리의 이웃이며 가족일 수 있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그 만큼의 상처를 주겠다는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과연 그것만이 최선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이미 서로를 향해 보이지 않는 칼을 들이대며 사는 세상이라면 너무나 절망적이다.
정의의 칼은 자신만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