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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전경린 지음 / 열림원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한 말이 뭘까?
사실 답은 모른다. 그러나 내 경우는 “엄마”가 아닐까 싶다.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기의 입에서 “엄마”와 흡사한 소리가 나오다가 드디어 “엄마”라고 말하면서 세상과의 소통은 시작된다. 아이에게 있어 엄마는 세상을 향한 첫 번째 문이자 다리와 같다. 그 ‘엄마’란 존재에 대해서 이 소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즘 ‘엄마’들이 변하고 있다. 이전의 희생과 인내의 대명사였던 ‘엄마’가 아니다. 당당히 자신의 삶에 영역 표시를 하고 있다.
<엄마의 집>을 문학평론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의 21세기 버전이라고 평했다.
오랜 역사 속에 ‘엄마’라는 여성은 자기만의 공간을 인정받지 못했고 그 억눌린 욕구들이 서서히 분출한 것이다. 한 여성이 자신의 육체 일부를 내어 생명을 품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순순히 자기만의 공간을 타인에게 내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우리로서 존재하는 ‘엄마’를 당연하게 여겨왔다. 우리를 위한 엄마였지, 한 여성인 엄마가 아니었다.
여성에게 ‘엄마’라는 수식은 축복인 동시에 무거운 족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엄마로서의 의무만을 요구하고 여성으로서의 권리는 모른 척했다. 세상이란 좁게는 그녀의 가족들이다. 나 역시 우리 엄마의 삶을 우리와 독립된 여자로서 바라보질 못했다.
너무나 이기적이게도 내가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엄마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어쩌면 그리도 무심했는지.
<엄마의 집>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이혼한 엄마가 사는 집. 엄마의 이름은 노윤진. 영자로 쓰면 세 글자에 모두 n이 들어간다. 그녀의 딸, 김호은은 이따금 엄마를 미스 엔이라고 부른다. 그 집을 주말에만 들르는 대학생 딸 호은이도, 전남편과 재혼한 여자의 중학생 딸 승지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소설 속의 엄마는 이혼으로 인해 사회적 차별을 당한다거나 딸과의 심각한 갈등은 보이질 않는다.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인다. 하물며 어린 승지조차 그들의 관계에서 어떤 거부감 없이 녹아 든다. 승지가 키우는 애완동물인 토끼(제비꽃이라 부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왜 그들은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호은이가 엄마를 미스 엔으로 부르는 것은 엄마를 한 여성으로 인정한다기 보다는 엄마에 대한 미움일 수도 있다. ‘내 유일한 가족은 나, 김호은’이라고 생각하니까.
엄마에게 이혼이라는 외적요인이 엄마의 집을 갖게 만들었다. 엄마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졌지만 딸은 인정하기 힘들다. 엄마에게 딸은 세상의 시선과 다름없다.
이혼은 분명 한 가정의 분열이며 가족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당사자들은 애써 담담한 척 숨기고 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가슴이 뻐개지도록 밀고 들어오는 진실들을 받아들이고 또, 승낙 없이 떠나려는 것들을 순순히 흘려 보내려면 마음 속에 얼마나 큰 강이 흘러야 하는 것일까. 진실을 알았을 때도 무너지지 않고 가혹한 진실마저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인 것이다. (253p)
그러나 딸 호은이도 어렴풋이 알아 간다. 자기 존재로부터 흘러갈 ‘나만의 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의 집>은 엄마의 존재를 부정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게 만드는 공간이 된다. 딸은 엄마를 잃어가는 상실감에 괴롭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엄마와 딸은 서로 화를 내도 결국 서로를 끌어안는 관계니까.
“ 엄마가 전에 말했잖아.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달나라에서 살 수는 없지만, 그곳에 찍은 발자국은 영원하다는 의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