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한정판)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유명한 고전이라는데 읽어 볼까, 그런 마음이 컸네요.
한두 편 정도의 작품을 읽어봤지만 뭔가 애매하게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네요.
근데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아하! 조금 알 것 같네.' 싶더라고요. 애초에 작가의 삶을 모르고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법인데, 단순히 나열된 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본인 스스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 단서를 얻었네요. 이래서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구나,라는 정도의 공감이랄까요. 서구화의 급물살을 타던 메이지 시대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된 거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나쓰메 소세키 장편소설이자 데뷔작, 그리고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당시 영문과 강사로 지내던 나쓰메 소세키가 서른여덟 나이에 문예 잡지 '두견새'에 처음 연재했던 소설이며, 1회로 끝낼 예정이었는데 호평을 얻어 장편으로 연재되면서, 이듬해 1906년 완성된 작품이라고 하네요. 무려 120년 전의 소설, 그 이야기 속으로 쑤욱 들어가 시대와 인간 군상을 구경하는 색다른 경험을 했네요.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7p)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네요.
이 소설은 이름 없는 고양이 '나'의 시점에서 인간들의 꼴사나운 면면들을 폭로하고 있네요. 길거리에서 태어난 '나'는 배가 너무 고파서 인간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갔고, 운명처럼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난 구멍'으로 들어가 '진노 구샤미' 집에 빌붙어 살게 되었네요. 주인 구샤미는 중학교 영어 선생으로 성격이 괴팍해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고, (이미 알려진 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을 대변한 인물.) 그의 집을 드나드는 여러 사람들과 입담을 즐기며 살고 있네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고양이 '나' 역시 에픽테토스를 읽다가 책상에 내던지는 학자 집안에 2년을 기거하며 먹물이 잔뜩 든 지식인 고양이가 되었네요. 우습게도 동네에 다른 고양이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지만 혼자 속으로 뻐기는 모습이 제 주인과 똑닮아 있네요.
구샤미의 주변 인물들을 보면 도긴개긴, 겉으로는 교양인인 척하지만 속은 불안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네요. 미학자, 사업가, 철학자 등 다양한 지식인들이 모여 쓸데없는 허세와 속물적인 논쟁을 벌이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웃에 사는 사업가 가네다와 그의 부인이 구샤미 선생을 험담하고 괴롭히는 모습이네요. 세상을 걱정하고 시대에 분개하는 고양이 '나'의 눈에는 그 인간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게 느껴지겠어요. 고양이로 태어난 탓에 그들과 설전을 벌일 수도 없고, 동네방네 떠들 수도 없으니 유유히, 아니 몰래 숨어들어 구경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네요. 구샤미 선생 집에 모여든 사람들끼리 '소세키'라는 소설가를 언급한 부분에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미리 예방주사를 맞듯이, 모질게 자아비평을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선생님,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합니다. 10년 전의 시에 비해 오늘날의 시는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으니까요. 요즘 시는 누워서 읽거나 버스 정거장에서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시를 지은 당사자도 무슨 질문을 하면 대답을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스피레이션 하나로 쓰는 탓에 시인은 다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이 없지요. 주석을 붙이고 뜻풀이를 하는 것은 학자들이 할 일이니 우리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제 친구 중에 소세키라는 자가 <하룻밤>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누가 읽어도 애매모호하고 두서없어서 당사자를 만나 무슨 소리를 하고자 한 것인지 주제를 물어본즉, 자기도 그런 것은 모른다면서 상대를 해주지 않더군요. 그런 점이 바로 시인의 특색인가 봅니다.」
「시인일 수도 있겠으나 참으로 묘한 사내로군.」
주인이 그렇게 말하자 메이테이 선생은 한마디로 이렇게 소세키를 평가했다.
「바보라고 해야 하지.」
(263p)
구샤미 선생이 유일하게 잘한 것은 새끼 길고양인 '나'를 거둔 것뿐, 그러니 '나'는 주변에서 욕을 먹는 주인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나름 편을 들어주네요. 그러나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주인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네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봐. 울게 좀 때려 봐.」
「울려서 뭐하려고요?」
안주인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물으면서 찰싹, 때렸다.
이렇게 상대의 목적을 알면 아무 문제가 없다. 원하는 대로 울어만 주면 만족시킬 수 있다.
주인이 이렇게 어리석으니 짜증스럽다. 울리는 게 목적이라면 그렇다고 빨리 말해 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공연한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 때리는 것은 그쪽 사정이고 우는 것은 이쪽 사정이다. 울 것을 미리 예상하고 이쪽의 사정인 우는 것까지 명령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도 이만저만한 오산이 아니다. 타인의 인격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고양이를 바보 취급하는 소행이다. 주인이 뱀과 전갈 보듯 싫어하는 가네다 군이나 할 법한 짓이지, 정직함을 자랑하는 주인으로서는 매우 비열한 짓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 주인은 그렇게 치사한 남자는 아니다. 따라서 주인의 이 명령은 교활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혜의 모자람에서 비롯된 유치한 발상의 산물이라고 추측된다.
···
주인이 안주인에게 또 물었다.
「지금 야옹하고 울었는데, <야옹>이 감탄사인지 부사인지 아나?」
(304-306p)
구샤미는 굳이 왜 아내 앞에서 잘난 척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아내와 투닥투닥,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있겠어요. 괴팍한 성격 때문에 동네 사람들도 뒤에서 수군수군, 미친 놈 취급을 당하는데도 제 딴에는 상당히 이성적이고 공평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네요. 하지만 진짜 자신을 모르는 게 아니라 슬그머니 눈 감아버리는 겁쟁이, 쫄보가 아닌가 싶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산페이 군이 가져온 맥주를 고양이 '나'는 취할 정도로 마시고, 비틀비틀, 첨벙!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놀라웠네요. 비꼬고 조롱하던 고양이, 진정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였네요.
「요컨대 요즘 사람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일세. 그런 자각심이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일거수일투족조차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어졌다는 걸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라는 사람이 스티븐슨을 평하기를, 그는 방에서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정도로 한시도 자신을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추세를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지. 눈을 감아도 나, 눈을 떠도 나, 이 나란 것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도처에 따라다니니까 인간의 행동거지가 인위적이고 좀스러워진 거야. 스스로도 답답하고, 세상도 숨이 턱 막히고. 아침부터 밤까지 맞선을 보는 남녀 같은 심정으로 지내야 하는 거야. 유유자적이니 느긋함이나 하는 말은 글자는 있어도 의미는 없는 말이 되고 말았지. 그런 점에서 요즘 사람들이 탐정 같고 도둑놈 같다는 걸세. 탐정이란 직업은 남의 눈을 속이는 한이 있어도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장사니까, 특히 자각심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되지. 요즘 사람들은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고 어떻게 하면 손해가 되는지를 생각하니까, 탐정과 마찬가지로 자각심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되지.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두리번두리번, 우왕좌왕.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사람의 마음이야. 그야말로 문명의 저주지.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야.」
「매우 흥미로운 해석이로세.」 도쿠센 군이 말했다.
「구샤미 자네의 설명이 내 의견을 대변하고 있군. 옛사람들은 자신을 잊으라고 가르쳤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니, 전혀 다르지. 하루 종일 자신을 의식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러니 한시도 평안할 수가 없지. 일상이 초열지옥이야. 천하의 명약이 무엇이냐, 자신을 잊는 것만큼 용한 약은 없지.」
(501-502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