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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메아리처럼
앤절라 미영 허 지음, 임슬애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부모가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빛을 흡수하고 주변의 시공간을 구부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심한 중력 시간 팽창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생산적이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때 뼈에 불과했으나, 이제 살이 붙었다.
내 언어의 옷을 입고 내 이야기를 노래한다."
(351p)
《우리, 메아리처럼》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앤절라 미영 허의 장편소설이에요.
소설은 엄마가 들려주는 한국의 옛날 이야기로 시작하네요. 주인공 엘사의 엄마는 전시에 유년 시절을 보낸 탓에 늘상 위험을 각오하며 극도의 경계 태세를 유지했고, 이민자가 된 후에는 생존을 위해 더더욱 투지를 불태워야 했어요. 엘사의 오빠 크리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신이 전시 대비 태세로 굳어졌다고 말했는데, 아마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싶어요.
이민 2세대인 엘사는 여성 물리학자로 남극 기지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되네요. 어린 시절 엄마가 들려줬던 에밀레종, 심청, 바리공주 같은 한국 설화 속에는 여성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집안의 저주가 담겨 있어요. 과거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은 세대를 넘어 끔찍한 저주가 되어 이어지고 있네요. 엘사는 이성과 논리의 세계인 과학을 선택함으로써 그러한 저주에서 도망쳤고 자신의 뿌리를 부정해왔어요. 이민자로 살아온 엄마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이야기로 풀어냈고, 딸은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끊어내려 해도 그럴 수 없음을 깨닫게 되네요. 운명의 빛과 그림자라고 해야 할까요. 어느 한 쪽이 사라진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리하여 물리학자인 엘사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이, 가족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가게 되는데요. 이건 마치 중성미자의 존재를 증명해가는 과정 같기도 해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구성 요소인 중성 미자는 초신성 폭발이라든가 감마선 폭발, 초대질량 블랙홀의 탄생, 빅뱅 같은 대변동으로 탄생한 기본입자다. ··· 시간이 탄생한 후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한 것이 바로 중성미자다. 은하계를 떠도는 방랑자, 생존자,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입자 물리학의 외로운 늑대. 딱히 내가 중성미자에 감정 이입하고 있는 건 아니다. 정말로. 그런데 이 파악 불가능한 중성 미자라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성미자는 <유령 입자>라고 불린다. 솔깃한 이름이지만 완전히 틀렸다. 사실 유령은 어정어정 주위를 맴도는 존재니까. 유령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소파에 죽치고 앉아 화장실 휴지를 축낸다. 자신의 슬픔으로 당신을 물들인다." (18-19p)
중성 미자는 '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입자가 아마 있을 것 같다!'라는 이론이 등장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중성미자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을 찾아내면서 존재를 증명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중성 미자 그 자체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우리는 충돌의 메아리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던 엘사가 진실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절묘하게 연결되네요. 엘사가 오스카르의 질문에 "기억."이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이 크네요. 특히 "항상 걷던 길을 따라가는 대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608p)라는 마지막 문장은 아름답고 경이롭네요. 우리에게 익숙한 옛 이야기는 낯선 풍경이 되었다가 다시금 새롭게 너와 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대의 고리가 되었으니 말이에요.
「지금 내가 하려는 이야기, 크리스는 모르는 이야기야. 어머니랑 언니 없이 나 스스로 알아낸 사실이지. 패턴을 살펴보고는 몇 세대 전에 기록된 나의 운명을 읽어냈지. 너랑 나, 우리는 삶이 흔해 빠진 옛날 이야기로 전락해 버린 여자들의 후손이야. 우리는 메아리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들의 삶을 살지만, 그 위대함은 닮지 못해. 어리석은 비극만 반복할 뿐이야. 우리는 그들의 삶에서 그것밖에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 여자들이 나한테 말을 건단다, 엘사. 난 남아 있는 그들의 이야기 대신 그들이 실제로 살았던 삶을 기록했어. 너한테 똑같은 비통함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내 삶은 이것보다 나았어야 했다. 넌 이 이야기들을 통해 미리 대비할 수 있을 거야. 너한테 주마. 이제 난 널 떠날 거니까.」
「아, 진짜, 엄마! 그렇게 어둡고 끔찍한 이야기를 듣기에는 나 너무 어리잖아요! 다 말해 놓고 잊어버리라고 하고. 드디어 엄마가 바라는 대로 컸는데, 대체 뭐가 문제예요?」
「크리스라면 지금 엄마가 날 조종하려 한다고 말할 거예요. 이제 나한테 자유로워질 기회가 생기니까 이런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엄마 고생 많이 했죠. 나는 어떻게 해야 엄마처럼 살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엄마의 삶에 빠져 죽지 않을지, 그 생각밖에 안 해요. 이제 엄마는 정신 나간 소리까지 하잖아요.」
「이건 네 오빠랑 상관없는 일이다. 이건 우리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야.」
(···)
「제발. 삶이 이렇게 됐다고 우리를 탓하지 말거라. 우리 집안 여자들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닐 거야. 우리 민족 모두가 하나같이 잘못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역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 우리 민족은 무슨 일이든 다 견뎌 냈다고 난리인데, 그게 퍽이나 미덕이겠다. 우리가 침략과 점령, 전쟁과 거지 같은 남편한테 시달리며 사는 것도 당연해. 백인들 나라에서는 자기들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하며 사는지 궁금하구나」
(95-98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