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위의 만찬
이용재 지음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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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얼큰한 국물이 땡기는 날이 있어요.

날씨 혹은 기분 따라 그날의 메뉴가 정해지는 거죠.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편이라 음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건 분위기예요.

지금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식은 뭘까라는 식으로 골라보는 거죠. 매번 그러는 건 아니고, 가끔 감성이 흘러 넘칠 때가 있잖아요. 늘 먹던 음식이라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음식이 되는 법이죠. 아마 다들 추억의 음식이라던가, 지치고 힘들 때 꼭 챙겨먹는 자신만의 소울 푸드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사연' 있는 음식 이야기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필름 위의 만찬》은 17년차 음식 평론가 이용재 님의 책이네요.

원래 이 책은 2019년 6월 시작해 2023년 6월에 마무리된 조선일보의 인기 칼럼 '필름 위의 만찬'에서 엄선한 내용들이라고 하네요. 저자가 엄선한 영화들은 처음부터 글을 쓰기 위해 염두에 둔 작품들이 아니라 20년 넘게 꾸준히, 격주마다 한 편씩 영화를 보면서 쌓인 만찬들 가운데 음식을 렌즈 삼아 더 재미있게, 더 새롭게 볼 수 있는 작품들이라는 점이 핵심이네요. 여기에 소개된 영화들은 워낙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봤을 가능성이 큰데, 저자의 해설을 본 다음에 영화를 다시 본다면 스쳐 지나갔던 음식 속에 숨겨진 디테일을 찾을 수 있네요. 무엇보다도 음식에 관한 저자의 확고한 철학이 느껴지네요. 감독의 의도를 분석해보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음식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비판하면서 레시피를 친절하게 알려주네요.

책의 구성을 보면, '욕망과 허기', '권력과 기만', '불안과 위로', '공감과 위로'라는 키워드로 나누어 영화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헤어질 결심 (2022)>에서도 취조실에서 해준과 서래가 나눠 먹는 특초밥 세트의 미학은 남다르다. 흔히 경찰서 취조 장면에서 연출되곤 하는 짜장면이나 설렁탕(혹은 국밥) 같은 대중 음식이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담음새나 포장 등이 박찬욱 감독의 미학을 입고 확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 해준은 자신의 집에서 나름 솜씨를 부려 밥을 볶아내지만 서래는 딱 한 입만 먹고는 넌지시 내친다. 이 태도는 얼핏 볶음밥이 대상 같지만 실은 해준을 향한 경계심일 수 있다고 나는 이해했다. 볶음밥이 너무 엉터리였으므로 되레 만든 사람을 경계해야 마땅했다. 밥을 한참 볶다가 달걀을, 그것도 풀지도 않고 바로 깨어 넣다니, 나는 그 장면에서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고 심지어 가벼운 불쾌함마저 느꼈ㄷ. 이런 볶음밥을 만들면서 주인공이 '중국식'이라 너스레를 떤다고? ··· 중국식 볶음밥이 엄청나게 까다롭고 어려운 음식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가정용 화력에서 웍 없이도 재현할 수 있다. 핵심은 달걀을 조리하는 요령과 타이밍인데 차근차근 살펴보자." (29-32p)

영화 속 음식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캐릭터의 정서와 서사를 완성하는 최고의 신스틸러가 아닌가 싶어요. 저자의 생각에 완전 공감했던 영화는 <웰컴 투 동막골 (2005)>에서 팝콘이 빵빵 터지는 장면이네요. 개연성은 떨어져도 관객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활짝 웃을 수 있는 순간이라서 명장면으로 꼽을 수 있네요.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일(강혜정 분)의 해맑은 표정이 눈에 선하네요.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울컥해지는, 추억의 영화네요.

"전쟁(6.25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를 정도로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살아온 마을에서 인민군 셋이 수류탄으로 모두를 압박한다. 아이고, 어쩐대. 하지만 목숨이 걸린 팽팽한 대치도 시간이 흐르면 느슨해지는 법, 인민군 소년병 택기(류덕환 분)가 졸다가 안전핀까지 뽑힌 수류탄을 떨어뜨린다. 아, 이렇게 다 죽는 건가? 러닝타임이 93분이나 남았는데 그럴 수 없다. 다행히 불발된 수류탄을 국군 소위 표현철(신하균 분)이 잡아, 말린 옥수수가 잔뜩 걸린 헛간으로 던져버린다. 뻥! 그렇게 동막골에 팝콘 눈이 쏟아지며 영화 초반 약 3분의 1 분량인 40분 동안 쌓아온 긴장이 해소된다. 음, 좀 싱겁겠는데, 옥수수 알갱이가 뻥 터지면 팝콘이 되기는 하지만 간을 해야 완성된다. 약간 짭짤하다 싶게 소금 간을 해야 진정한 팝콘이라 할 수 있다. 워낙 발상 자체가 기발한지라 그냥 깔깔 웃고 넘어갈 수 있지만 당시 한국에 팝콘용 옥수수가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엄밀히 따지면 개연성이 정말 떨어짐에도 <웰컴 투 동막골>에서 팝콘으로 한참 쌓아 올린 긴장을 해소한 선택이 참으로 기발하고도 아름다운, 또한 그 외에도 보고 난 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나도 팝콘을 통해 요리의 극적 효과를 처음 맛보았다. 다섯 살 때쯤, 아버지가 종종 팝콘을 튀겨주셨다. ··· 이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얽힌, 거의 유일한 좋은 기억이다." (341-343p)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관람 후 수다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영화 장면 속 음식 이야기만으로도 풍성한 만찬이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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