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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ㅣ 마음시 시인선 17
이정하 지음 / 마음시회 / 2026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눈이 멀었다
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줄
까맣게 몰랐다.
(14p)
이정하 시인의 시집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개정판이 나왔네요.
초판 발행일 1997년 11월 15일, 사람의 나이로 보자면 스물여덟, 스물아홉이 되었네요.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으나 시는 조금도 늙지를 않았네요. 그대를 처음 본 순간을, 강렬한 햇빛처럼 눈이 부셔서 '눈이 멀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고, 그대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 그렇게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들만이 공감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네요. 시인은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괄호 속의 '나'를 빼놓고서는 진심을 전할 수 없어요.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그대 마음에 가 닿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노라는, 눈물겨운 고백이네요.
"그대와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 그로 인한 아픔은 내 인생 전체를 덮었다. / 바람은 잠깐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 그 때문에 잎새는 내내 흔들린다는 것을. ··· 상처입지 않으면 아물 수 없듯 / 아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네. /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고 /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고 / 있다는 것을, 그대여 진정 아는가." (26p)
아파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시인은 묵묵히 그 자리에서 애절하게 외치고 있네요.
"그래, 내가 /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 너를 위해 나를 /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 잠겨 죽어도 좋으니 /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27p) <낮은 곳으로>라는 시의 일부분이네요. 흐르는 강물처럼 그대의 마음이 흘러흘러 낮은 곳에 있는 내게로 밀려오기를 바라고 있네요.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오직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그 마음이 참으로 아름다워요. 낮은 곳에 있고 싶은 그 마음이 사랑이라면 세상을 온통 사랑으로 채우고 싶네요. 모두가 높은 곳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세상에서, 누가 낮은 곳에 가려고 하겠어요, 바보가 아니고서야... 바보, 바보처럼 다 내어줄 수 없으니 사랑은 저만치 멀어져가네요. 사랑한 만큼 외롭고, 사랑한 뒤에 괴롭고 슬프다면서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아름다운 거예요.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시인은 <바람 속을 걷는 법2>에서 그 답을 알려주고 있어요.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 그래, 산다는 것은 /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 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지." (66p)
우리는 바람 속을 걷는 사람들, 흔들리고 휘청거려도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 그 바람을 헤쳐나가야 해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