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즈번즈
박소해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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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잘못 본 줄 알았어요.

허즈번드가 아니라 허즈번즈라고?

《허즈번즈》는 박소해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더라니, 역시나 장르를 넘나드는 놀라운 이야기였네요.

비극적인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토록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상 그 이상이었네요. 우선 첫 장에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다음 장에는 나가스 저택 배치도가 나와 있어요. 마치 추리소설처럼 이야기의 주무대가 되는 나가스 저택의 흑죽관과 이기리스관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저택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앞서 놀랍다고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니에요. 오히려 입이 떠억 벌어져서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해방은 남자의 것이었다.

수향은 아직 해방되지 못했다.

1945년 10월. 서울에 살고 있는 열네 살 소녀 수향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해방의 좋은 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향을 비롯한 여자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시절, 여자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고 가정 안과 밖 모두에서 벽을 마주해야 했다. 해방은 단지 일본인의 자리를 조선인 남자가 차지한 것에 불과했다." (29p)

주인공 수향은 창백한 피부, 겁에 질린 듯한 큰 눈을 가진 소녀예요. 어린 시절, 제주도에서 심방(무당)이었던 외할머니에게 굿을 받고 아기 심방이 된 뒤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었어요. 의지할 데 없던 어린 수향을 알뜰히 살펴주시던 외할머니가 수향이 열 살 때 돌아가시자, 친아버지 권도진이 수향을 서울로 데려갔고, 그때부터 새어머니 송난실의 구박을 받으며 하녀처럼 지내게 되네요.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수향과 그의 가족들은 적산가옥인 나가스가 대저택에 살게 되었고, 수향은 2층 제일 끝에 있는 아담한 방을 쓰게 됐어요. 나가스가 장남인 마사키 도련님이 쓰던 방인데 큰 책장에 책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고,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책등이 유독 많이 낡아 있는 제11권 『포 걸작선』을 먼저 꺼냈더니 거기엔 비밀을 품고 있는 흑백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네요. 포를 좋아하는 수향과 취향이 같았던 마사키,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해방 이후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거의 그대로 남겨진 물건들과 저택에서 수향은 그 존재를 보고야 말았네요.

"들······ 어······ 오······ 지······ 마······. 이······ 집에 오지마······." (56p)

애초에 그 경고를 무시해선 안 되는 건데, 하지만 어린 수향에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고, 미리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니 참으로 고약하고 못됐네요. 바로 그 집에서 원치 않는 혼례를 치뤘으니 말이에요.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월, 수, 금요일마다 수향의 방으로 밤에만 찾아오는 남편은 뭔가 이상했어요. 같은 얼굴, 같은 몸이지만 매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고, 수향은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남편 영우를 관찰하고 기록했네요. 허걱, 기가 막힌 진실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급반전, 새로운 장이 펼쳐지네요. 혼란과 비극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누군가의 지독한 해방일지를 몰래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엿본 것 같아요.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이야기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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