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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다 -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정병호 지음 / 푸른숲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유골발굴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의 과거를 파내는 어둡고 무거운 행사가 아닙니다.
젊은 세대들이 만나 교류하고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는 역동적인 현장입니다." (133p)
공공인류학의 길을 정립한 정병호 교수가 일본 현지 주민들에게 1997년 슈마리나이에서의 유골발굴 경험과 그 의미를 설명한 내용이네요.
《긴 잠에서 깨다》는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에요.
이 책의 내용은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발굴과 한·일 시민 평화운동 : '동아시아공동워크숍'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故 정병호 교수 구술녹취록을 바탕으로 펴낸 기억과 연대의 기록이라고 하네요. 강제노동 희생장 유골발굴에 관한 이야기 속에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막연히 반일 감정이 앞섰는데 어떻게 발굴이 시작되어 기나긴 프로젝트로 이어졌는가를 알고 나니, 역사의 교훈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네요.
"미국 대학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해 일본 어린이집들을 비교하는 현장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1989년 가을이었다. 훗카이도 시골의 작은 절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을 만났다. 매일 밤 서로의 가치관, 아동관, 보육관을 이야기하며 새벽을 맞이하곤 하던 어느 날, 도노히라 스님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의 한 댐 공사 현장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많은 조선 사람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벌써 10년째 숲속에 묻힌 유골을 찾아내 불교식으로 화장해 모시고 있다고 했다. 희생된 분들의 유족을 찾아서 유골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_ <기억과 추모의 공공인류학> 중에서 (26p)
정부 차원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시민단체의 사람들이 해냈다는 점이 놀라워요.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던 2015년, 훗카이도에서 유골발굴을 시작한 지 18년이 되었는데, 한일 양국 정부가 내놓은 과거사 입장은 다음과 같았어요. 박근혜와 아베 정부가 나서서, "과거는 덮고 미래로 가자"고 선언했고,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모든 역사 문제를 덮고 넘어가려는 시도가 노골적이었어요. 유골발굴은 그저 과거의 흔적을 파내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기억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골 봉환을 해야 할 때라고 결정했고, '70년만의 귀향' 프로젝트에 돌입했다고 해요.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2015년 추석 무렵 일제 강제노동 조선인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네요. 서울 시청 광장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파주 서울시립묘지에 안치했으며, 이들이 안치된 납골 묘역을 '70년만의 귀향' 묘역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이후 희생자들이 살았던 고향집 어귀에 각 개인의 존재와 희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평화디딤돌'을 놓기 시작해 일본 각지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과 희생 경위를 새긴 평화디딤돌을 놓고 있다고 하네요. 동아시아 공동워크숍 활동의 영향으로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시민운동가들이 모여, 2024년 가을 '슈마리나이강제노동박물관'을 건립했다고 하네요.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유족 찾기, 그리고 '70년만의 귀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이 이뤄낸 결과였네요. 다만 그런 활동과 경험이 사회적 기록으로 충분히 남아 있지 않는다는 점, 워크숍에 함께했던 구성원 중에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 저자는 안타깝고 마음에 걸린다고 이야기하네요. 그래서 이 책이 가진 의미가 더 크게 느껴졌네요. 가해자의 책임은 흐려지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지워진 채 과거를 묻지 않는 미래지향만을 강요하는 기이한 기억의 공백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 문제의식을 품고, 역사를 기억하며 오늘의 시대를 자각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서로 다시 연결되고 함께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미움과 분열, 갈등을 넘어서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기억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이들의 발자취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