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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유령들
M. L. 리오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1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우린 어쩌다 이렇게 끔찍한 인간들이 된 걸까?"
"모르지. 원래부터 끔찍했는지도." (306p)
서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 그들은 미처 몰랐을 거예요. 1997년 9월, 델러처 고전예술학교 4학년, 연기 전공인 일곱 명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예술학교 특유의 자유로운 캠퍼스 분위기에서 불쑥 살인 사건이 등장하리라곤, 저 역시 예상하지 못했네요. 놀랍게도 이 소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대 위가 아닌 현실에서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통해 펼쳐내는 데에 성공했네요.
《셰익스피어의 유령들》은 M.L. 리오의 데뷔작이자 셰익스피어에게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인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하네요. 첫 장에는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 4학년생 일곱 명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어요. 리처드는 거침없고 솔직한 성격,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조각 같은 외모로 장군, 폭군 등 강렬한 배역을 도맡고 있으며, 넘치는 자신감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에요. 메러디스는 아름다운 외모로 당당한 매력을 살린 유혹적인 배역을 주로 담당하고 있고, 2학년 봄부터 리처드와 사귀기 시작했어요. 렌은 리처드와 사촌 관계지만, 그와는 상반된 작은 체구와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어요. 알렉산더는 활기차고 장난스러운 성격에 어울리는 악당, 요정 배역을 자주 맡고 있으며, 늘 약물이나 알코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요. 필리파는 매사 침착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큰 키에 올리브색 피부, 중성적인 매력으로 여성은 물론 남성 배역까지 모두 소화하고 있어요. 메러디스와 렌에게 밀려 비중 없는 배역을 맡고 있어요. 올리버는 여러모로 지극히 평범하고, 스스로 동기들 중 가장 재능이 없으나 4학년까지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배역이든 적당히 맡을 만한 실력이지만 무대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에요. 근데 프롤로그에 올리버가 '나'의 화자로 나와서 깜짝 놀랐네요. 제임스는 전형적인 영웅 캐릭터로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모두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배우예요. 친구들이 인정하는 잘생긴 외모와 아이 같은 순수한 감성을 지녔으니 누군들 싫어하겠어요. 그를 싫어한다는 건 그의 탓이 아니라 그를 시기하는 마음 때문일 거예요. 마치 잘 짜여진 연극 무대처럼 일곱 명의 캐릭터가 누가 하나 빼놓을 수 없이, 각자의 배역을 상징하는 듯 보이더니, 역시나 서서히 갈등이 고조되면서 실인 사건까지 벌어졌고, 잔인하게도 그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주제, 인간 심리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인물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왔네요.
"교수님도 우리 모두 자신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어. 난 트로일러스 같은 사랑에 빠진 바보 역할을 하는 데 진력이 났고, 너도 늘 조력자 역할만 맡는 데 질렸을 거 아냐."
"그렇네, 네 말이 맞을 지도."
"뭐가 웃겨?"
"아무래도 크레시다 역은 네가 해야겠다. 우리 중에 그 역을 맡을 만큼 예쁜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25p)
"자, 누가 한번 말해볼래? 우리의 좋은 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뭘까?"
"두려움이요."
"맞아.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지?"
"약점을 들키는 거요."
"바로 그거야. 우리가 연기하는 건 기껏해야 인물의 50퍼센트밖에 안 돼. 나머지는 그냥 자기 자신이야. 그래서 사람들한테 자신의 실체를 내보이는 게 두려운 거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바보 같아 보일까 봐.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열정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일 뿐,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러므로! 그 두려움을 없앨 거야, 바로 오늘부터. 숨기려고만 들면 좋은 연기를 해낼 수 없어." (46p)
"배우란 원래 불안한 존재니까. 감정과 자아, 질투라는 자극적인 요소들이 연금술을 만나 탄생한 신비로운 생명체. 그것을 한데 모아 뜨겁게 가열해 휘저으면 때로는 황금이 된다. 또 때로는 파멸이 되기도 하고." (85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