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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불이 흐르는 바다 - 바다를 모티프로 한 영미 명작 단편선
윌라 캐더 외 지음, 유라영 옮김 / 리듬앤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책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를 보면서 이미 마음이 홀랑 넘어간 것 같아요.
"바다를 모티브로 한 영미 명작 단편선!"이라는 문구에서 살짝 호기심을 느꼈다면, "침대 밑에 숨겨 놓고 몰래 읽던 바로 그 책!"이라는 문구에서 당장 읽고 싶어졌어요. 상상하는 무엇이든간에,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점은 확실하네요.
《차가운 불이 흐르는 바다》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영미권 작가 일곱 명의 단편모음집이네요. 여기에서 제가 아는 작가는 <빨간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뿐이지만 이 책 덕분에 훌륭한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네요. 조지 에저턴의 <교차선>, 윌리 캐더의 <갈매기 나는 길>,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아를에서의 하루>, 세라 온 주잇의 <잃어버린 연인>, 앤 리브 올드리치의 <마을의 오필리아>, 캐서린 맨스필드의 <항해>, 루스 모드 몽고메리의 <바다가 부르는 소리>까지 읽으면서 신기했어요. 분명 서로 다른 이야기인데 묘하게도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아무래도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들이기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녔던 게 아닌가 싶어요. 여성이기에 강요당하는 규범들을 일일이 언급하진 않지만 소설 속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 불편한 기류를 느낄 수 있어요. 겉보기엔 순응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마치 광활한 바다를 보는 것 같아요. 멀리서 바라보면 평온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넘실대는 파도가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잖아요. 화창한 날에는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지만 폭풍우가 치는 날에는 무서운 괴물로 돌변하는 바다, 그러니까 일곱 편의 단편 소설에서 바다는 주인공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수수께끼 같은 사랑의 또다른 모습인지도 모르겠네요. 차가운 불, 완전히 상반된 두 개념의 결합으로 완성된 모순, 그 역설이야말로 인간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네요. 차가운 불이 흐르는 바다에 풍덩 빠져서 일곱 작품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네요.
"지읒으로 시작하는 말인데." 그녀가 손끝으로 남편의 이마에 상상의 글자를 쓰기 시작하다가 마지막 글자까지 쓰고 나서 그의 귀를 톡 건드리고는 말한다. "기역으로 끝나는 말이 뭐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남편의 얼굴에 턱을 비비며 묻는다. "근데 당신, 나 좋아하긴 하죠?"
"그럼, 당연하지.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소?"
"알아요, 아마 알 거예요." 그녀가 조급하게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 말을 직접 듣고 싶은 거예요. 여자는 사랑이 아무리 바다처럼 깊어도 죽은 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하면 눈길도 안 준다고요.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작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표현해 주기를 바라죠. 여자가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가 날 사랑해 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요." _ 조지 에저턴 <교차선> 중에서 (28p)
"··· 그런데 기도하시면서 '이 늙은 여종'이라는 말을 12번도 넘게 반복하시더라니까요. 아니, 늙은 여종이라니! 전 아직 제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그게 10년 전 일이에요. 제가 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려고 애쓴 적도 없지만, 그 양반 말만 들으면 저를 무슨 100살 다 된 늙다리 할망구로 알겠더라니까요." (148p)
"어느 겨울인가 미스 호레이샤가 세일럼에서 지낼 때 그분을 만났는데, 얼마 안 있어 그분이 바다로 떠났어요. 그때보다 근래 몇 년 사이에 이 얘기를 훨씬 더 많이 들어요. 세일럼 사람들은 그때 이미 떠들 만큼 떠들었을 텐데요. 제가 아는 건 그 뒤로도 미스 호레이샤한테 좋은 혼처가 여럿 들어왔지만 다 거절하셨다는 거예요. 아마 미스 호레이샤 마음이 그분과 함께 바닷속 깊은 곳에 묻혀 버린 거겠죠." _ 세라 온 주잇 <잃어버린 연인> 중에서 (149p)
"지난 한 해는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꿈이었지. 하지만 결국 꿈일 뿐이었어. 이제야 그 꿈에서 깼어. 네 덕에 깨어난 거야. 네가 결정적이었어! 내가 그걸 이제야 알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
"뭘 말이야, 노라?"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 오, 롭, 넌 내 전부야.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네 곁과 이 바다야. 오늘 밤 항구를 건너오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어. 여기 도착하고 나서 알게 된 거야. 한순간에 깨달음이 홍수처럼 밀려왔어. 다시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확신했어. 난 바람과 파도의 부름을 들을 수 있는 이곳에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는 걸." _ 루시 모드 몽고메리 <바다가 부르는 소리> (258-25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