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로 가야겠다
도종환 지음 / 열림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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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도종환의 시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가 현실정치에 몸을 담글 무렵 동무들의 염려가 없지 않았다. 성정의 밝음과 심지 굳음을 아는 나는 아무 걱정 말고 잘 다녀오시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난해한 정치판에 도종환 같은 향수제조업자가 들어가 판을 향기롭게 한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일 아니겠는가. 난해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그에게 어찌 지냈는가, 밥맛은 있었는가 묻고 싶은 이들에게 이번 시집은 도종환스런 충직한 답변이 된다." 라고 곽재구 시인은 말했어요. 그동안 대중들에게는 정치인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다시 본래의 자리, 시의 자리로 돌아왔네요

《고요로 가야겠다》는 5년 만의 신작 시집이라고 하네요. 제목을 보면서 '나도, 고요로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시집을 펼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반응한 거죠. 나희덕 시인은 이 시집의 화자들이 폭풍의 시절을 지나 고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표현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아요. <이월>이라는 시에서, "녹았던 물을 다시 살얼음으로 바꾸는 밤바람이 / 위세를 부리며 몰려다니지만 / 이월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 지나온 내 생애도 찬바람 몰아치는 날 많았는데 / 그때마다 볼이 빨갛게 언 나를 / 나는 순간순간 이월로 옮겨다 놓곤 했다 / 이월이 나를 제 옆에 있게 해주면 위안이 되었다 / 오늘 아침에도 이월이 슬그머니 옆에 와 내가 / 바라보는 들판의 푸릇푸릇한 흔적을 함께 보고 있다" (22-23p) 를 보면 살얼음과 찬바람으로 몹시 춥지만 불평하지 않고 이월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순응적인 태도가 느껴져요.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는 게 아니라 결국에는 지나갈 일,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네요. <고요>라는 시에서도, "바람이 멈추었다 / 고요로 가야겠다 / 고요는 내가 얼마나 외로운 영혼인지 알게 한다 / 고요는 침착한 두 눈으로 / 흘러가는 시간을 보게 하고 / 육신이야말로 얼마나 가엾은 것인지 알게 한다 / 고요는 내 안에 오래 녹지 않은 얼음덩이와 / 그늘진 곳을 보여준다 / ··· 고요는 ···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물 한 잔을 건넨다 / 다시 아침 해가 뜨고 /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 생은 계속된다고 조그맣게 속삭인다" (54-55p) 라고 자신의 외로움, 절망, 분노, 상처를 '고요'라는 내면의 힘으로 어루만져 주고 있네요. 한 편의 기도처럼,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처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라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고요는 마음 깊숙히 감춰둔 비겁하고 창피하고 나약한 자신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 안에는 퇴색하지 않고 반짝이는 것과 푸른 이파리처럼 출렁이는 것이 있다며 위로해주고 있어요. 그러니 고요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운명>이라는 시에서는, "바람을 원망하지 마라 / 구름을 원망하지 마라 / 들풀의 풀들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고 / 산벚나무는 구름을 원망하지 않는다 ··· 상처받고 풀어지는 / 그게 네 운명이었다" (72p)라고 말해주는데, 이것이 시끄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끝>이라는 시에서, "빈 가지 끝에 매달려 흔들리는 / 강가의 겨울나무 / 마른 나뭇잎 몇 개 / 아름답다 / 공허의 끝 / 그 끝에서 다시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일 / 우리가 매달리는 필생의 일도 그런 것이다" (242p) 라며 흘러가는 세월, 점점 늙어가는 우리에게 그 끝을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알려주네요. 세상사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다가 그 바람이 멈춘 자리에 고요가, 그 안에 아름다운 나 자신이 서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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