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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깃든 산 이야기 ㅣ 이판사판
아사다 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한여름 무더위에도 무서워서 꼭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야 안심했던, 그래서 땀은 삐질삐질, 후끈한 이불 안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겨우 잠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어릴 때는 유난히 깜깜한 어둠이 무서웠고, 방문을 활짝 열어둔 채 자야 하는 여름이 싫었더랬죠. 근데 어느 날부턴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둠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고, 점점 괴담을 좋아하는 아이로 변해버렸네요. 이상한 건 뭔가 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부분만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는 거예요. 가끔 직접 겪은 일인지, 아니면 그냥 꿈을 꾼 건지 헷갈릴 때가 있잖아요. 어른이 된 뒤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겁 많던 시절에 오싹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몸이 알아서 반응하네요. 이 소설은 왜, 나의 기억이 아닌데도 잊고 있던 뭔가를 깨우는 느낌이 드는 걸까요. 이제껏 봐 왔던 괴담에 비하면 공포감은 덜한데 너무나도 묘해서 여운이 길게 남네요.
《신이 깃든 산 이야기》는 아사다 지로 작가님의 자전적 괴담집이라고 하네요. 상상의 산물이 아닌 실제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실존하는 무사시미타케산이라는 영산이며, 그곳이 바로 저자의 외갓집이에요.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간략한 설명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아요. 편집자 후기를 보면, "1951년생인 아사다 지로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 도쿄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오쿠타마에는 태곳적부터 신을 모셔온 영산 미타케산이 있습니다. 이곳 산속에 있는 신관저택은, 실제로 아사다 지로 어머니의 친정집이에요. 부모의 이혼으로 작가는 미타케산의 신관저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밤마다 이모가 들려주는 괴담 같은 잠자리 옛날이야기는 일종의 자장가였지요. 그 자장가는 신비로우면서도 매혹적인 내용으로 가득했고, 소년 아사다 지로의 상상력을 강하게 키워주었다고 하네요. 작가는 '미타케산에서의 생활이 없었다면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얘기했대요. 그렇습니다. 작가가 어린 시절 미타케산에서 들었던 괴담이 바로 아사다 지로 소설의 원점이었던 것입니다." (416-421p)
신을 모시는 집안의 후손인 저자는 종종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서 사람의 생사를 미리 알아차리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네요. 이 소설집에서는 <귀천하신 외숙>을 통해 본인의 은밀한 능력을 고백하고 있어요.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고립감이 더 깊어진 것은 가정사 때문이 아니라 그 능력 때문이라는 거예요.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삶은 불행하지만, 없어야 할 것을 가지고 있는 삶은 더욱 불행하다." (90p) 라는 문장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무게를 느꼈네요. 그럼에도 순순히 변함없이 신을 받드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어요. "나에게 미타케산은 여전히 신비 자체였다. 육체가 크는 만큼 세계는 작아지고 지식을 얻은 만큼 불가사의는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미타케산에서는 이런 당연한 원리조차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헤이 씨나 가마쿠라 아주머니나 덩더쿵 갑부의 설화나 저택에 얽힌 온갖 이야기나, 내가 듣고 보았던 모든 일화는 시제를 결여한 채 뒤범벅으로 기억되었다. 생사관을 바탕에 둔 불교에는 시제가 있지만 애초에 생명이란 개념과 인연이 없는 신도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체감한 '신들의 편만', 즉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신이 깃들어 있다는 공기는 결국 그런 것이었다." (394p) 신기하게도 저자가 들려주는 미타케산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묘한 능력이 저자에겐 훌륭한 이야기꾼으로서 발현된 게 아닌가 싶네요. 신사로 이어지는 울창한 삼나무 숲길을 상상하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소설가는 이야기로 씨앗을 뿌리는 존재, 그리하여 그 씨앗들은 저마다의 꽃과 열매를 피워내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