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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안개 상·하 세트 - 전2권
영온 지음 / 히스토리퀸 / 2025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변절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리고 친일파 같은 작자들은 애당초 변절을 하지 않아. 처음부터 매국할 생각뿐이었으니 그 어찌 변절이라 하겠느뇨. 허나 가족의 안위가 달려있다 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것이 사람이다. 그 심경을 어찌 모르겠느냐마는, 적어도 우리는 그래서는 아니 된다. 나와 동지들에게는 왜놈의 땅이 아닌 본래 우리의 영토에서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고, 우리의 글과 우리의 말을 쓰며 당당하게 조선인으로 지내는 것에 대한 타는 듯한 그리움이 있다.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이 많기로서니, 우리마저 잃는다면 실로 모든 것이 끝날 게다. 생각해 보거라. 이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가 이 꼴을 당하였겠느냐? 또한 다른 조선인들은 어이하여 이리도 고통받고 있겠느냐?" (상권_197p)
대일 항쟁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물빛 안개》는 암울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던 우리 민중들의 이야기네요.
첫 장을 읽는 순간, 앗! 놀라운 장면을 보고야 말았네요. 아직 읽지 않은 이야기 속 인물인데도 그가 어떠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 무슨 선택을 한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거든요.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우리 역사인데...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자 잊힌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소설이기에, 후대에 기록조차 남지 않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네요. 존재조차 몰랐던 독립 영웅들을 마음 깊이 기리며,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네요. 혹시나 이러한 설명 때문에 진중하다 못해 지루한 이야기로 오해할 수 있는데, 강렬한 첫 장을 넘기면 다음 장에서는 일본 총독의 조선인 양아들 후지와라 히로유키 중위와 그의 관저에서 일하는 여급 남정화의 이야기가 아슬아슬하면서도 흥미로웠어요. 피도 눈물도 없는 매국노이자 '독사 장교'로 소문이 난 히로유키가 유독 정화에게 관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속셈을 알 수 없지만 번번이 도움을 받는 정화는 죽기를 각오하고 서대문 감옥에 갇힌 사촌언니 관영의 면회를 요청하는데... 미묘한 감정이 오가지만 현실은 냉혹하네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입장이 시대 비극을 더욱 잘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후에 그려지는 상황들은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점점 물빛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네요. 왜 소설의 제목이 '물빛 안개'에 대해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전하고 있어요.
"자욱한 안개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한 강물처럼,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조국의 독립'은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여 '물빛 안개'로 표현했다. 정들었던 보금자리를 떠난 이들에게는 고향의 안개조차 그리움의 대상이리라 생각하여 탄생한 말이다. 아울러 흐릿한 안갯속에 가려진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대한의 독립을 바라는 가상의 독립군단인 '명중경단 明中景團'이 존재하는데, 밝고 맑은 하늘에 떠오른 볕은 태극,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고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 혹한의 땅에서, 그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을 바랐을지 생각하던 차에 나온 이름이다. 같은 의미의 '푸른 하늘에 붉은 해'라는 상징이 독립을 염원하는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대변해주기를 바랐다." (하권_327p)
광복 80주년, 올해가 특별한 이유는 오랜 세월 잊고 있던 역사의 영웅들이 현재의 우리들을 살렸다는 걸 깨닫는 나날이었기 때문이에요. 내란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 영웅들, 광장에서 탄핵을 외친 수많은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느꼈어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역사를 잊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었네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토착왜구들, 친일매국노를 과감하게 청산하는 일이 아닌가 싶네요. 안개를 모조리 거둬내어 찬란한 빛을 맞이해야 할 시점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