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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ㅣ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독특한 책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큰키나무, 크리스마스 트리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낯설지 않지만 그 숲에 손수건과 작은 모자가 놓여 있는 풍경은 뭔가 이색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어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들었네요. 이 숲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요.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숲'을 주제로 한 로베르트 발저의 글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산문 선집이에요.
로베르트 발저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됐어요. 스위스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시인이며,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생의 마지막 28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으며, 1956년 12월 25일, 홀로 산책을 나섰다가 눈 위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고 하니 열광적이고 고독한 산책자였네요.
첫 장에 나오는 <숲 1>이라는 시를 보면, "나는 이 숲에 들어왔고 / 지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 평온은 끝났다 / 나는 이 숲에 들어와 / 우두커니 바라본다. 숲이 참 아름답구나! / 숲속에 햇살이 노릇노릇 걸려 있다. / 내 안에서 감정과 감각이 일렁인다. / 이 숲이 어떻게 이리도 아름다울까, 이리도? / 지금 내게는 온 세상이 죽었다. / 여기 말고는 숨 쉴 곳이 없기 때문이다. (···) 어떤 느낌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수줍어서. 그러나 감각의 간사함으로 / 여기 말고 세상은 죽었다." - 1900년경 (9-10p) 감정과 감각이 일렁이고 있는 숲의 아름다움과 숲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숲이 아닌 세상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어요. 여기에 수록된 그림들 중 카를 발저의 <숲> (1902~1903년경) (68p)이 발저의 숲이 지닌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형 카를의 삽화를 넣은 『숲』이라는 책을 1904년 출간했다고 하네요. 빌저의 숲에 관한 시들은 대부분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발저가 숲을 독일 민족의 집단적 상징이나 억압의 징조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요. <산책 2>라는 글에서, "때때로 나는 우두커니 서서, 어떤 콜럼버스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메리카 대륙 같은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137p)라고 표현했는데, 발저의 숲은 자신의 내면 세계라고 볼 수 있어요. "숲은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와 자유라고 불리는 것들은 모두 숲을 사랑한다." (26p), "숲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한다." (31p) , "숲은 자기만의 다정함을 흔쾌히 내게 모두 보여주려 하고, 내가 가식만 벗는다면 결코 나를 지루하게 하는 법이 없다." (145p) 라는 했는데, 이는 숲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자 숲과 동일시되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장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