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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12월
평점 :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이라면 무조건 읽어봐야지, 라고 할 정도 믿고 보는 편이에요.
《비정근》을 읽으면서 역시나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네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라는 점, 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새로웠고, 각 장마다 추리소설의 치트키를 제대로 보여줘서 감탄했네요. 각 장마다 배경이 되는 학교 이름이 이치몬지 초등학교, 니카이도 초등학교, 미쓰바 초등학교, 시키 초등학교, 고린 초등학교, 롯가쿠 초등학교인데 일본어로 1, 2, 3, 4, 5, 6 이라는 숫자를 변형한 것임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알게 됐는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요소까지 치밀하게 설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네요. 중요한 건 제목인데 비정근, 즉 감정 없는 비상근 교사라는 뜻인데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비정한 게 아니라 현실이 비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네요. 잔인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확 비틀고 뒤집은 거죠.
겨우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아이들인데... 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 같기도 해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 큰 것이지, 열두 살과 열세 살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비상근 교사인 '나'는 반 아이들을 선뜻 믿지도 않지만 섣불리 의심하지도 않는 거예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아이들에게, "인간은 나약한 존재란다. 선생님도 인간이야. 나도 약하고, 너희들도 약해. 약한 사람들끼리 도우며 살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어." (109p) 라고 말해주는 것이나, "사람이란 말이야. 당연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해.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사람을 좋아해서 얻는 건 많지만 싫어해서 얻는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이야. 그렇다면 굳이 사람을 미워할 필요가 없지." (141p) 라고 얘기해줄 때 진짜 어른답다고 느꼈어요. 길냥이를 돌보는 게 나쁜 일이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물론 나쁘지 않아. 그렇지만 생명을 돌보려면 책임을 져야 해. 아이에게 밥만 주면 되지 더 필요한 게 뭐가 있겠냐고 하는 어른이 있다면 무책임하게 느껴지겠지?" 라고 답하자, 아이들은 "근데 그런 부모는 많은데요."라고 말했고, 그는 "그래서 세상이 이 모양이란다." (210p) 라고 했어요. 자꾸만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더라고요. 세상이 이 모양인 건 무책임하고 나쁜 어른들 탓이니까요.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된 시기가 2003년, 벌써 20여 년이 흘렀는데 이 모양이던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고, 최근에 출간된 작품처럼 전혀 이질감이 없다는 것이 충격이네요.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교사, 학생들이 늘고 있으니 현실이 너무나 비정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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