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하소서 -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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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에요.

시간이 약이란 말도 있지만 그 세월로도 치유되지 않는 것들이 있네요.

《한 말씀만 하소서》는 박완서 작가님이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아픔의 기록이자 절절한 기도문이네요.

"우리 집 안방 아랫목 제일 높은 자리엔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한 작은 십자고상이 걸려 있습니다. 세례받을 때 선물 받은 거여서 비슷한 게 이 방 저 방에 더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자주 대하고 따라서 가장 많이 원망을 받고 언젠가는 내팽개쳐지는 행패까지 당한 이 못 박힌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은 건 최근의 일입니다. '오냐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또 죽이려무나, 네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나 여기 있지 않으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의 표정은 생생하게 슬프고 너그러워 보였습니다. 이 일기는 똑같이 찍어낸 주물에 지나지 않던 성물과 이렇게 아무하고도 똑같지 않은 특별한 관계를 맺기까지의 어리석고도 고통스러운 기록의 일부입니다. 정리하면서 활자화시키기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무엄한 포악과, 비통의 지나친 반복만 빼고는 거의 고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2주기까지 넘겼건만 아직도 제 회의와 비통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제 자아 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채송화 씨보다도 작은 신앙심을 누구에게 떠다밀린 것처럼 마지못해긴 하지만 마침내 어디론가 던졌다는 사실입니다. 거기가 흙인지 양회 바닥인지조차 아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싹이 틀 수 있는 좋은 땅이길 바라는 마음이 이 지면의 연재 요청에 응할 엄두를 내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p)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어요. 불과 얼마 전 항공참사로 수많은 생명을 잃었기에 유가족들의 고통이 떠올랐어요. 즐거운 가족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 길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뉴스를 통해 수없이 재생 반복되는 사고 현장 영상을 이제 더는 못 보겠어요. 유가족들의 절절한 외침에 눈물이 왈칵 났어요. 박완서 작가님은 남편을 병으로 잃고 불과 3개월 후에 서울대 의대 레지던트였던 막내 아들을 잃었어요. 스물다섯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떠난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는 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지금 박완서 작가님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이 책은 20년 만의 개정판으로 맨 마지막 장에는 박완서 작가님의 맏딸 호원숙 가작님의 글이 실려 있어요.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쓰신 그때의 일기를 다시 열고 싶지 않았다. ...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슬퍼하셨다. 누구와도 나눌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그 비애를 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롭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문득문득 그 고통을 못 이겨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의 일기를 다시 읽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처럼 눈이 내린다. 첫눈이 아낌없이 넉넉하게 대지를 덮어주었다. 세상의 모든 허물과 아픔을 감싸안듯이." (209-211p)

오늘 참으로 많은 눈이 내렸어요. 온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하얀 눈으로 덮어버린 오늘, 저 역시 머리 숙여 기도를 올렸어요. 주여, 한 말씀한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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