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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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떠한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브 엔슬러는 45년에 걸쳐 써온 글들을 주제별로 묶어 한 권의 책을 냈어요. 이 책에는 이브 엔슬러의 인생을 이끌어 온 사유가 담겨 있어요. 저자는 상실과 모순에 관한 사유와 슬픔에 관한 사유, 애도도 되지 못하고 나누어지지 못한, 소화되지 못한 슬픔이 너무나 많다고, 그래서 이 책은 '어떤 슬픔의 형상'이라고 표현했어요. 혼돈과 폭력, 어린 시절의 구타와 강간이 남긴 기억 상실, 파편화된 지성이라는 균열을 넘어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발견했던 '나'는 글쓰기가 하나의 생존 방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갑자기 번쩍 번개가 치듯이, 머릿속에 '폭력'과 '기억 상실'이 터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과거 어느 시점에 어린 '나'는 끔찍하고 비참했던 경험을 기억에서 지우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마저 잊고 싶었다는 걸 떠올리고 말았어요. 십대 시절에 일기장을 채워가며 아픈 마음을 위로했지만 점점 글을 쓰는 것이 두려워졌던 이유도, 그건 발가벗겨진 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겁쟁이였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수많은 비극들을 목격하면서 아픔과 슬픔은 살아 있는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브 엔슬러의 깊게 뻗어나간 사유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트라우마의 시대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고, 왜 이브 엔슬러가 V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네요. 저자의 말처럼 저 역시 이야기의 힘, 이름이 가진 힘을 믿어요. 진득하게 쌓여 있던 고통들이 기억들을 통해 드러날 때,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그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걸 V가 알려줬네요.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는 V의 회고록이자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슬픔과 희망의 사유이기에 읽을 수밖에 없었네요.



"사유는 대체 무엇이며 지금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할까?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의 행위를 수반한다.

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결정한다.

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 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

지난 45년간 나는 수많은 글과 일기를 썼다.

내게는 까만 글씨 위에 에스프레소 자국이 짙게 남은 종이 한 무더기가 있다.

모놀로그, 연극, 기사, 에세이, 우화, 연설문, 시, 불평들이다.

코로나19는 내게 그간 써온 글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내 일생의 천착과 호기심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사유에 관한 책 한 권이 되었다."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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