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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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얼마가 됐든 돈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잠시 전화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뭐라고?"

이윽고 딴 사람이 된 듯한 사야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며칠 동안 돈을 마련해 보겠다고 엄청난 굴욕과 고통을 맛보았지만,

사야카가 내뱉은 그 "뭐라고?" 만큼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을 받은 순간은 없었다. (66-67p)


돈 때문에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미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이후에 협박 당하는 장면들이 많기 때문에 불법 사채가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한 경고는 될지언정 돈을 빌린 사람의 사연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들은 왜 위험한 줄 알면서도 불법 사채라는 지옥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되었을까요. 아무도 그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다만 이 소설이라면 지옥 같은 현실을 목격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시가 아키라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작년에 나온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원작이 시가 아키라의 동명소설이라고 해요. 미스터리 공포 범죄 스릴러 장르였는데 이번 소설 역시 불법 사채 지옥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네요. 주인공 다카요는 남편의 폭력과 빚 문제로 도망치듯이 집을 나와 일곱 살 딸아이와 단둘이 사는 싱글맘이에요. 현재 실직 상태로 임대료가 밀리면서 돈에 쫓기는 상황이 되자 SNS 불법 개인 사채업자 미나미에게 돈을 빌리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들이 다카요의 시점에서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어요. 세상에는 분명 좋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빚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의 주변에는 이상하리만치 나쁜 놈들뿐이네요. 세렝게티, 대초원은 멀리서 바라보면 평화롭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먹고 먹히는 잔인한 생존 싸움이 펼쳐지는데, 무리에서 떨어지거나 상처를 입고 약해진 동물은 포식자들에겐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아요. 인간 세상에서 돈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당신이 속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요. 읽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처음엔 석 달 치 월세가 밀렸을 뿐인데, 그 임대료를 내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 다음은 생활비 때문에, 그 다음은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점점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빚 때문에... 그야말로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어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다카요를 보면서 첫 장에 적혀 있는 문장을 곱씹게 됐어요. "내 인생의 좌절은 그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7p)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떠올려 보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과의 인연이 중요한 변수였어요. 다카요는 '그 남자'라고 말했지만 여기엔 단순히 한 사람만 해당되는 이야기로만 볼 수 없어요. 그저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설이 '속는 사람'과 '속이는 사람'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들려준 이유가 있었네요. 돈은 잘못이 없어요. 불행의 책임은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으니까요. 인류 역사 이래로 돈의 힘이 가장 강력해진 건 사실이지만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건 돈이 아니라 돈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아닌가 싶네요.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요. 덫이든 늪이든, 한 번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 없는데 진짜 위험은 인간이길 포기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어떤 핑계로도 납득할 수 없는 악의 끝을 보고나니, "헉!"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어요. 허무하고 슬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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