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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봄은 오는데
백영옥 지음 / 밥북 / 2024년 1월
평점 :
"찬란했던 '서울의 봄'은 그렇게 끝났다."
영화 <서울의 봄> 에서 마지막 장면과 함께 나오는 이 자막을 보면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꼈어요. 아마 많은 이들이 우리의 현대사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을 거예요. 영화 말미에 반란군의 단체사진 촬영신에서 반란군들의 이후 행적과 이력들은 창작이 아니라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들의 이력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하네요. 알게 모르게 그들은 정부 고위직, 국회의원을 두루 거치며 잘 먹고 잘 살았는데, 반란을 막으려 했던 군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말로 끝까지 군인의 본분을 다했음에도 짓밟히고 말았네요.
반란군에 맞섰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강제 전역을 당한 뒤 전두환이 아직 대통령이던 1987년 11월 기자회견에서 "12·12는 지휘계통을 무시한 하극상"이었다고 규정하며 진상규명을 외쳤는데, 갑자기 실종됐고 5개월 뒤 경기도 양주의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나 수사기관은 자살로 결론을 내렸어요. 정병주 전 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반란군에 맞서다 총에 맞은 김오랑 중령은 숨졌는데, 김 중령의 부인 백영옥은 그 충격으로 시력을 잃었으며 1990년 전두환·노태우 등 반란 주범들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 준비에 나섰는데 소송 포기 협박에 시달리다 5개월 뒤 자택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어요. 경찰은 백영옥이 한 번도 혼자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옥상에서 실족사했고 사건의 목격자는 없다고 발표했어요. 국립묘지에 김오랑과 합장되었어야 할 백영옥의 유골은 영락공원 무연고 납골함에 10년간 보관되었다가 산골 터에 뿌려져 이젠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하네요.
영화에서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는 반란군을 막아선 오진호 소령(정해인 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김오랑 중령이에요.
《그래도 봄은 오는데》는 김오랑 중령 아내 백영옥의 자전적 에세이예요.
"깜깜한 절벽만이 눈앞에 보이는 나에게도 봄은 용하게 찾아왔다." (4p) 라고 저자는 1988년 4월 서문을 썼지만 당시12·12 반란 세력의 탄압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는데 드디어 35년 만에 재출간되었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됐어요.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진실을 덮으려는 자, 그것은 기억하려는 자와 기억마저도 조작하고 없애려는 자의 싸움인데 국민들이 읽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어찌보면 겨우 책 한 권일 뿐인데,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책의 배포를 막았을까요. 이 책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결국 출간되었고 우리는 12 ·12 반란과 그에 맞선 김오랑의 죽음을 알게 되었어요. 김오랑을 사살한 박종규 중령은 김오랑 중령과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고 관사에서도 위아래층에 살던 이웃이었으며 12·12 군사반란이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부부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는 게 더 충격적이네요. 그를 찾아가 따졌던 일화가 책 속에 나오는데 박 중령은 자신도 작전 때 엄지손가락을 다쳤다면 손가락을 들이밀더래요. 자기가 쏜 총탄에 죽은 사람도 있는데 총을 겨눈 손가락 하나 다친 게 더 중요한 듯 굴다니 참으로 역겨운 일이네요. 불의한 권력에 편승해 사익을 얻어낸 비굴한 족속들이 더 이상 활개를 칠 수 없도록, 이제는 우리가 막아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저자는 불교에 귀의해 하루하루 사랑을 베풀며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았건만 그들은 아니었네요. 1990년 12월 백영옥은 노무현·장기욱 변호사를 통해 신군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는데 그때부터 보안사, 안기부(현 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감시와 압력을 받았고, 1991년 6월 28일 밤, 전두환·노태우·최세창·박종규 등에 대한 민사소송 직전에 사망했어요.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의 책은 여기, 우리 곁에 남았네요. 계절은 돌아오지만 서울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스님은 사람의 시신을 태울 때 가장 오래 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내게 물어 오셨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스님은 바로 '심장'이라고 하시며 '백 보살도 가슴으로 살아가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가슴으로 산다는 일, 순간 남편의 얼굴을 직접 못 봤지만 사령관실에서 붉은 피를 쏟았을 그이의 심장이 떠올랐다. 무서웠다. 그러나 스님 말씀대로 나의 남편이 가슴으로 살다 갔다는 생각과 그 심장의 피를 다 쏟아 놓으면서까지 올바른 자신을 지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종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죽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 밑바닥에 뭔가 꿈틀거리는 의식들이 금방 잡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17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