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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밀리미터의 싸움 - 세계적 신경외과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
페터 바이코치 지음, 배진아 옮김, 정연구 감수 / 흐름출판 / 2024년 1월
평점 :
《1밀리미터의 싸움》은 세계적인 신경외과 의사인 페터 바이코치의 책이에요.
저자는 하이델베르크 의과대학에서 11년간 일하면서 신경외과를 전공했으며, 2007년 베를린 자선병원의 신경외과 최연소 과장으로 임명되었고, 뇌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럽 신경외과학회(EANS) 연구상, 독일 신경외과학회 연구상, 세계 신경외과 연맹 젊은 신경외과 연구상 등을 수상했다고 하네요.
이 책에서 저자는 신경외과 의사로서 직접 집도했던 열두 건의 수술 사례를 통해 의료진들과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뇌수술과 신경의학의 세계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면서 신경외과 의사들이 직면한 도전과 실패, 윤리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요. 복잡한 뇌수술에 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과정으로 수술이 진행되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요. 중요한 건 뇌질환에 관한 정보도 있겠지만 그보다 신경외과 의사의 솔직한 심정을 알게 됐다는 점인 것 같아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의사의 이미지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냉정함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냉정함이 의사 본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고된 훈련의 결과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 책이 아니었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거예요. 걱정, 불안, 의심이 신경외과 의사라는 직업의 영원한 동반자라는 걸.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괴물'이었어요. 저자는 뇌 안에 동정맥 기형을 머릿속에 잠자는 괴물이라고 표현했어요. 뇌혈관 기형의 하나로 보통 뇌 발달 초기에 시작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지는데 동정맥 기형의 문제는 모세 혈관이 없어서 발생한 부위에 영양 공급이 되질 않고 피가 빠르게 질주하는 고속 구간이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기형 혈관은 대부분 혈관벽이 완전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그 두께가 얇은 탓에 쉽게 파열되거나 찢어져 버린다는 거죠. 혈관 파열로 출혈이 발생하면 그 결과로 사망할 위험성이 약 20퍼센트에 이르고, 출혈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나머지 80퍼센트도 영구적인 뇌 손상을 입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동정맥 기형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데, 이걸 제거하자니 수술 후 합병증이 심각할 수 있고, 그냥 놔두자니 매순간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니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환자의 판단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자는 의학적인 결정을 내릴 때 언제나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해요. 수많은 수술을 해왔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건 각각의 환자 케이스에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요. 감정이 무뎌지기까지 그저 시간의 문제라고 여겼는데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환자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때마다 느끼는 좌절감과 고통을 피할 수 없었던 거죠. 저자는 제발 그런 일들에 영향을 덜 받게 되기를 소망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적어도 정상적인 상태의 인간이라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각종 연구가 보여주듯이 감정이 생성되고 제어되는 뇌 부위는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간에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며 매번 지치는 법이 없어요. 신경외과 의사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같은 맥락에서 신경외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수술을 찬양하고 영웅화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신화화와 영웅화가 전문 분야를 정체 상태에 빠져들게 만드는 원인이며 윤리적인 일탈을 초래하기 때문에 외과 의사의 역할을 탈영웅화하고 각각의 뇌수술 뒤에 얼마나 많은 팀워크가 숨겨져 있는지, 얼마나 많은 뛰어난 전문가가 협력하는지, 그 과정에 얼마나 고도로 발달한 최신 기술이 도입되는지를 보여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해요. 인디애나 대학병원의 애런 코헨-가돌이 말했던 "신경외과는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추악한 것 사이의 협정"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자는 신경외과라는 분야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매혹과 열정뿐 아니라 머릿속 괴물과 맞서 싸우는 험난한 여정을 여과 없이 잘 보여줬고, 마지막 소감을 뉴욕 레녹스 병원에서 일하는 데이비드 랭어의 말로 대신하고 있어요.
"나는 25세의 젊은 의학도로서 신경외과라는 분야에 대해서 처음 느꼈던 경이로움을 오늘날까지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 이 분야에 종사하며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감사함이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데 대한 감사함 말이다. 여기에 이 분야 특유의 인간미와 감수성이 더해진다. 그것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기술적, 지적인 도전들과 함께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른 존재를 도울 수 있는 감동적인 경험을 허락해 준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문명이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우리는 최고가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489p)
이 책 덕분에 1밀리미터의 싸움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배웠어요. 아무래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레녹스 힐 닥터스」 를 찾아봐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