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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ㅣ 투명 시인선 1
최진영 지음 / 투명 / 2023년 9월
평점 :
누군가 간절한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 이토록 위안이 될 줄이야.
드러내지 못한 마음, 일부러 감췄던 마음,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 그 마음을 글로 쓸 수 있다면 시가 되었을 거예요.
시를 읽으면서 너무나 알 것 같아서 마음 한 켠이 찌르르, 시인의 말 덕분에 켜켜이 쌓여 있던 마음들이 스르르 흘러가네요. 시인은 "뒤돌아보니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아픔마저도 다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p)라고 말했는데, 아픔마저도 사랑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도 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이라는 단어가 왠지 시리고 아프네요. '기꺼이'가 아니라 '기어이' 그럴 수밖에 없는 듯, 그럼에도 사랑하며 살아야겠지요.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는 최진영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라고 하네요.
우선 PK 가 뭔지 몰라서 궁금했는데, 온라인 게임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는 플레이어 킬링(Player Killing) 혹은 그 일을 행하는 플레이어 킬러(Player Killer)의 줄임말이래요. <PK 1> 과 <PK 2>라는 시를 보면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만드네요. 눈 앞의 적을 처치하면 아이템을 획득하고, 레벨이 올라가며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는 것. 게임 화면에 뜬 문자, [이 지역에는 아군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계속 죽이시겠습니까?] (55p) 를 현실에 그대로 옮겨와도 낯설지 않다는 게 더 소름끼치네요.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 집을 나서면서부터 / 우린 이미 게임을 시작하고 있는 거야 / (···) 나보다 약할 것 같은 놈들은 경험치 도시락이지 / 내가 레벨업이 필요할 때 PK 를 걸자고 / 쓸 만한 아이템 하나에 목숨 하나 / 내 레벨을 올릴 수 있다면야 뭐. / 다들 그렇게 살잖아? / (···) 언제나 등 뒤는 비어 있고 / 정면에서 웃고 있는 놈이 가장 위험한 놈이지 / 걱정하지마! 죽이면 죽일수록 우린 강해질 거야." (56-57p)
지긋지긋한 경쟁 사회, 그야말로 전쟁터 같아요. 성적으로 줄 세우고, 돈으로 줄 세우고, 힘으로 줄 세우는 세상에서 나는 그 줄 어디쯤인지 곁눈질할 수밖에 없어요. 레벨업을 위해서라면 뭐든 가능한 게임이 이미 우리 현실에서도 진행 중이지만 그 살벌한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은 역시 사랑인 것 같아요. 시는 간절한 희망이자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아침>이라는 시,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 우리 조금만 더 사랑하자 // 오늘이 마지막이더라도 / 널 가장 사랑했던 날이 / 오늘이 되도록." (100p)에서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들었어요. 모든 사람들의 아침이 괴로움보다는 사랑으로 가득하길 바라는 시인의 진심이 느껴졌어요.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힘들어도 버티는 거죠. 최진영 시인의 첫 시집은 2021년 발간되었고, 초판 1,000부가 모두 나가는 데 2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바로 그 첫 시집이 2023년 새로운 표지로 나온 거예요. 어둡고 붉은 빛 바탕 위에 칼 모양의 표지가 섬뜩할 수도 있지만 시를 읽고나니 칼보다 칼을 쥔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우리 삶은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