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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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상황을 알게 됐지만 불과 몇 시간 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었어요.

타인이라는 이유로 모른 척 할 수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목격자가 된 기분이에요. 꼼짝없이 그들의 상황을 지켜봤으니.

소설의 첫 장을 열자마자, 《약속》은 나를 그들의 세계로 확 끌어당겼어요.

책 표지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성의 사진은 분명 이 소설을 쓴 데이먼 갤것 작가님인데, 표정만 봐서는 결코 즐거워보이진 않아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설가이자 백인 남성인 그는 소설 《약속》으로 2021년 부커상을 수상했는데, 그때 수상 장면을 찍은 사진도 표정이 알쏭달쏭해요. 기뻐해야 할 순간인데 눈빛은 뭔가 다른 말을 하는 듯, 역시나 그의 수상 소감은 "여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 와보니 내가 오면 안 될 자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였어요. 그러나 이 소설은 우리가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던 아프리카에 관한 하나의 문을 열어줬고, 그 문을 연 이상 더 깊숙히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1980년대 중반 남아공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대한민국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 이들이 있었고, 꽃다운 청년들은 무자비한 국가폭력 앞에 쓰러져갔어요. 역사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보통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외침은 그저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였어요. 인간답게 살자고, 살아야 한다고 외쳤을 뿐이에요.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권리가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권력자가 외치는 자유가 그들만의 특권이 될 때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야기되고, 보통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는 사라지고 말아요. 독재정권은 자유를 보장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인권 침해, 언론 탄압, 시민사회 억압 등으로 사회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역사는 시민들의 들끓는 분노와 강력한 저항이 어떻게 변화와 진보를 이끌어냈는지 알려주고 있어요.

《약속》의 첫 장면은 학교 기숙사, 스피커에서 들리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교장실로 향하는 아모르를 보여주고 있어요.

아모르는 교장선생님의 입에서 참 안타깝구나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눈물을 찍어내는 마리나 고모를 보면서도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요. 엄마한테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엄마는 항상 살아 있을 거니까 눈앞에 벌어진 일은 꿈일 거라고. 하지만 짐을 챙겨 고모를 따라 고모집에 들렀을 때 고모부가 네 엄마 일은 정말이지 안됐다고 말하는 순간 울음을 터트렸어요. 사촌 베셀은 무덤덤하게 네 엄마 일은 정말이지 안됐다며 앵무새처럼 말하며 제 관심사인 우표 앨범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페르부르트(아파르트헤이트의 설계자로 불리는 남아공 제7대 수상)가 암살당한 지 몇 개월 후 기념우표 3종 세트 우표예요. 일말의 감정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사랑하는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 아모르라는 소녀의 심정이 느껴지나요.

남들 앞에선 위선적인 눈물 연기를 보이는 마리나 고모는 방금 엄마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아모르에게 엄마가 유대인이라서 잘못됐고, 잘못된 인간이라고 떠들고 있어요. 그리고 아파르헤이트, 이 단어에 꽂히네요.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며, 극우 국민당 백인정권이 흑인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스린 반인륜적인 인종차별정책인데 스물네 살의 백수인 사촌 베셀은 그 기념우표를 만지작대고 있으니 어떤 인간인지 알만 해요.

마리나 고모의 언행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감지돼요. 고모는 유대인 출신인 아모르의 엄마 레이철을 남동생 마니의 치명적인 실수이자 결점으로 여겼고, 이제 그녀가 죽었으니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내심 만족하고 있어요. 그러니 조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가울 리가 없는 거죠. 실수의 결과물이니까. 진짜 지독한 차별과 혐오를 목격하니 입이 떠억 벌어지네요. 헉!

《약속》은 말 그대로 약속이 핵심인 이야기예요.

아모르는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는 딸인 동시에 중요한 목격자예요. 농장주 백인 가족의 이야기로 보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떠올리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결정적인 한장면이라는 점에서 아모르는 역사의 산 증인이에요. 암으로 투병 중이던 엄마 레이철이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흑인 하녀 살로메에게 그녀가 사는 허름한 집의 소유권을 주자고 남편에게 말했고, 아내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겠노라 약속하는 걸 막내딸 아모르는 똑똑히 봤어요. 겨우 열세 살 소녀도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더군다나 아빠는 기독교인이니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아빠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실망한 아모르는 고향을 떠났어요. 30여 년이 흐른 뒤 농장으로 돌아온 아모르는 스와트 가족의 마지막 일원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어요. 네 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에야 비.로.소. 한 걸음 내딛었다고, 놀랍게도 코피 꼭대기에서 벼락을 맞았던 아모르만 제정신으로 살았던 거네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으니 말이에요.



"... 아직도 네가 모르고 있는 게 있는데, 네 것을 주는 게 아니야.

이 집은 이미 우리의 것이니까. 이 집뿐만 아니라 네가 사는 그 집도 그렇고,

그 집이 서 있는 땅도 그래. 우리 거야!

네가 정리해서 호의로 나눠 줄 수 있는 네 소유물이 아니라고. 백인 아가씨,

네가 가진 모든 것은 이미 내 것이야. 내가 요청할 필요도 없이." (475p)


"어서 서둘러 갈 길을 가라, 아모르, 벼락이 그대를 향해 또다시 오고 있다.

끝나지 않은 일은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다.

그녀는 서둘러 폭풍보다 앞서서 간다.

하지만 그녀가 집을 향해 코피 koppie (작은 언덕)를 미끄러지듯

기어내려가기 시작했을 때에만 간신히 앞섰을 뿐이다." (481-4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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