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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도르 1~5 세트 - 전5권 - RETRO PAN
김혜린 지음 / 거북이북스(북소울) / 2023년 3월
평점 :
테르미도르 (Thermidor).
그것은 꽃과 길로틴이 공존하는 계절.
그리고 지금은 슬픈 울림을 남긴 채
세월의 지평으로 사라진 이름.
태양의 계절 - 테르미도로.
나는... 핏빛의 꽃잎들이
눈물처럼 후둑후둑 지는
소리를 듣는다... (7p)
대한민국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를 아시나요.
만화 잡지의 전성기, 90년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추억이 새록새록하네요.
굉장히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만화잡지를 알게 됐고 하굣길은 신나게 친구집에 가서 함께 보던 기억이 나네요. 발간일이 하루이틀 늦어지면 안달복달 조바심내던 그 시절의 마음조차 추억이 되었네요. 각자 애정하는 작가님은 달라도 순정만화를 향한 사랑만큼은 꼭 닮았던 친구들이 그리워지네요. 바로 그 르네상스에 연재되었던 작품이 새롭게 복원되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어요. 응답하라 1988 세대를 위한 선물 같아요.
《테르미도르》 는 김혜린 작가님의 작품이에요.
멋진 박스에 담긴 다섯 권 세트를 받자마자 기뻐서 요리조리 돌려가며 인증샷을 찍느라 바빴어요.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전권 소장이라니, 잠시 감동의 물결이 밀려와서 그 순간을 즐겼네요.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으로 쓱쓱 웹툰을 보는 게 익숙해서 아날로그 세대의 만화책 감성을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인기 웹툰 단행본이 꾸준히 사랑받는 걸 보면 독자의 마음은 세대초월이 아닐까 싶어요.
보통 순정만화라고 하면 가볍고 유치한 로맨스 이야기일 거라고 추측할 텐데, 김혜린 작가님의 작품은 감동과 서사가 있어요. 특히 테르미도르는 굉장히 수준 높은 역사물이에요.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력의 열월, 즉 여름날을 뜻하며, 저항과 광기, 유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요. 첫 장면부터 아름답고 강렬해요. 남프랑스 툴롱의 황금빛 레몬 나무 숲에서 천진하게 뛰노는 소로뉴 백작가 소녀 알뤼느는 플로비에 후작가 소년 줄르에게 레몬 가지를 통째로 꺾어달라고 해요. 그때 보스코 수도원의 사동 유제이가 레몬 몇 개를 훔치려다 인부들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는 걸 줄르가 말린 다음 유제이에게 레몬을 내밀고, 알뤼느는 손수건을 건네지만 유제이는 두 사람을 외면한 채 가버려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가버린 유제이에게 알뤼느는 화를 내죠. 하지만 줄르는 이렇게 말해요.
"어쩜... 우리가 주제넘었는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줄르."
"우린 이렇게 가지째 마구 땄잖아. 그 앤 겨우 두세 개 가졌던 것뿐인데..."
"이 레몬 숲은 우리 소로뉴가(家)의 것이란 말이야, 줄르. 갖고 싶으면 사야지 도둑질을 왜 해?"
"하지만 아까 그 앤 숲도 돈도 없었을 거야..." (12p)
1789년 7월 14일 파리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실체를 세 주인공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요. 혁명과 역사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게 쉽지 않은데 아름다운 그림체와 수준 높은 대사,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전달하고 있어요. 이 작품을 처음 접한다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절판된 책이라 추억으로만 떠올렸는데 이렇듯 새롭고 멋진 편집본 세트가 나왔으니 감격스럽네요.
김혜린 작가님에게 《테르미도르》는 아픈 손가락이라고, 아프지만 복이 많은 손가락이라고 하네요. 왜 아픈 손가락일까, 그건 아마도 이야기 속의 그들이 아프고 슬픈 청춘이라서가 아닐까 싶어요. 이 작품이 연재될 당시 우리들의 청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는 만화라는 장르가 과소평가되었지만 지금은 그 위상이 높아졌어요. 훌륭한 작품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나는 법이니까, 다시 보는 명작 《테르미도르》의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네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