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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사람들이 밀드레드를 거만하다거나 잘난 체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니까.
간단하게 쓰게. 예술에 대한 밀드레드의 사랑을,
일반 독자도 접근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해."
나는 이후 몇 주에 걸쳐 비슷한 지시를 받고 했다.
찍찍 그어진 문단과 느낌을 죽인 문장이 늘어갈수록 내 배신감은 깊어져갔다.
"밀드레드의 사랑스러운 부드러움을 좀더 강조해서 전달해야 하네.
'부드러움'과 '강조'가 모순적인 단어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정말이지, 바로 그 점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네.
밀드레드의 연약한 천성에 말이야. 밀드레드의 취약함에. 친절함에."
"잘 알겠습니다. 부인의 그런 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아, 그건 나보다 자네가 훨씬 잘할 거야."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굳이 억누르지 않았다.
"뭐, 자네의 그 섬세한 손길이라면 딱 맞는 선을 건드릴 수 있을 거라고 믿네." (328p)
《트러스트》는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1920년대 월스트리트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특이한 점은 밀드레드 베벨이라는 인물에 관해서 네 명의 화자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에요. 그러니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소설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끝까지 읽어야만 완성되는 퍼즐 같은 이야기예요. 우선 밀드레드 베벨은 금융계의 신화적인 인물인 앤드루 베벨의 아내예요. 앤드루는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베벨 부부에 관한 소설 때문에 몹시 화가 났고, 이를 반박하기 위한 자서전을 집필하게 돼요. 그 자서전을 대필한 사람은 앤드루 베벨의 비서인 아이다 파르텐자예요. 그녀는 앤드루 베벨이 어떤 식으로 진실을 조작했는지를 폭로하고 있어요. 마지막 화자는 밀드레드 베벨이에요. 남편과 주변인들이 들려준 밀드레드와 본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실체가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할 수 있어요. 트러스트(Trust)는 신뢰라는 의미 외에 경제학 용어로 시장지배를 목적으로 동일한 생산단계에 속한 기업들이 하나의 자본에 결합되는 것, 일종의 기업합병을 뜻하는 말이라고 해요. 이 용어는 석유재벌 폭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에서 유래되었는데, 록펠러는 트러스트 증권(신탁증권)을 교부해주는 조건으로 여러 석유회사의 의결권이 있는 주식이 소수의 수탁자에게 위탁되도록 하여 독점적 지배를 행사했다고 해요. 이러한 독점의 피해 때문에 독점금지법이 제정되었다고 하네요. 이 소설에서는 경제, 금융, 돈, 권력, 계급, 인종 등 진지한한 사회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밀드레드 베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만우절은 가벼운 거짓말을 해도 되는, 비공식적인 날이이에요. 왜 생겼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안한다면 모를까, 다들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잖아요. April Fool's Day, 4월 바보의 날에 <트러스트>를 읽고나니, 부와 성공, 사랑마저도 거짓말처럼 느껴졌어요. 진실은 무엇일까요. 세상 모두를 속일 수 있어도 단 한사람, 자신은 알고 있어요.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가 승리에 있어서는 적극적 주체이지만
실패에 있어서는 수동적 객체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승리하는 건 우리지만,
실패하는 건 우리가 아니다 -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 힘 때문에 망가지는 것뿐이다." (88p)
"내 일은 정답을 맞히는 거야. 언제나.
조금이라도 틀리면, 나는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서
내 실수가 더 이상 실수가 아니게 되도록 하네.
현실을 조정해서 내 실수에 맞도록 구부리지." (305p)
"나는 그게 우리 결혼생활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가 정말로 결혼생활이 시작된 때라는 걸 알았다.
맹세를 한 상대보다는 맹세 자체에 더 헌신하게 될 때가
진정한 결혼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447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