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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은 이렇게 말했다 - 최인훈과 나눈 예술철학, 40년의 배움
김기우 지음 / 창해 / 2023년 2월
평점 :
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해요.
중요한 건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아닐까 싶어요.
최인훈 작가는 대표작 <광장>과 함께, 문학 수업에서 접했던 작가와 작품 해설이 전부였어요. 광장과 밀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고도의 상징적 요소를 통해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주제를 전달하는 작품이라는 것.
《최인훈은 이렇게 말했다》는 문학박사 김기우님의 책이에요.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는 이른바 벽돌책의 위엄에 살짝 놀랐는데, 책의 의미를 알고나니 꽤나 압축한 요약본으로 느껴졌어요.
한 사람과의 인연 그리고 인생 이야기를 담기에 한 권은 너무 부족하니까요. 저자는 최인훈 선생님의 제자로 연을 맺게 된 1982년 2월부터 선생님의 생애 끝자락인 2018년 7월까지,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아찔했던 면접 시간 이후 불합격일 거라고 낙담했는데, 최종결과는 합격이었고 그 기쁨을 '구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그토록 원하던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최인훈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말이죠. 수강신청을 하러 사무실에 들렀다가 최인훈 작가님이 담배를 피워 문 모습이 서양 희랍 시대의 철학자, 플라톤의 흉상을 닮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어쩐지 사랑에 빠져 콩깍지가 씐 상태로 보였네요. 그야말로 문학청년의 눈에 비친 작가와 작품에 관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일기였어요.
1994년 4월, 최인훈 선생님의 <화두> 출간을 기념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선생님은 <화두>에 자신의 삶을 기록해 두셨다. 선생님의 삶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증인으로서의 세월이었다. 선생님은 '공룡의 꼬리에 붙은 비늘'로써 스스로의 문장으로 적어나가겠다고 작심하신 것이었다. 가장 자기다운 언어를 골라 가장 합리적이고 섬세하게 자신을 그려나갔다. 언어의 기록으로 자신을 온전히 찾고 오래 남길 수 있다는 희망이었으리라. 그 소망은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216p)
문학과 소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신 스승님을 자신의 힘으로 분석하고 싶었다는 저자는 최인훈의 예술론과 창작론은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다고 해요. 실제로 선생님께서, "자네의 이번 학위논문, 잘 썼어. 내 작품을 내 이론으로 분석해서가 아니라, 체계가 잘돼 있고, 무엇보다 내 작품과 이론을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봤다고 생각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논문을 징검다리로 활용하기를 바라네. 자네도 이번으로 끝이 아니라 계속 수정보완해 나가면 좋겠다." (558-559p)라고 말씀하셨대요.
세월이 흘러, 저자의 제자가 <최인훈의 예술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하여 선생님께 보여드리는 장면이 뭔가 감동적이었어요. 스승의 책을 보물로 여기는 제자가 선생이 되고, 새로운 제자가 문학 연구를 이어가는 과정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로 느껴졌어요. 저는 아직 <화두>를 읽어보지 못했으나 지금 시대의 화두가 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화두>의 주인공 '나'는 기억을 최선의 가치로 생각하며,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를 우리이게 할 것은 기억뿐이라고 이야기하네요. 선생님께서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화두>를 쓰셨듯이, 저자는 선생님을 잊지 않기 위해 이 편지를, 이 한 권의 책을 썼다고 해요.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무엇인지, 스스로 답해야 해요.
"<뉴스타파>라는 방송에서
친일파 후손을 찾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많은 후손이 회피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로시인 한 분이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문학인으로서 조부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발언하기 어려웠을 텐데,
그분은 대신 사죄하겠다고 했습니다."
"잘한 일이구나. 우리 근현대사에서 잘한 일, 두 가지가 있다.
'소녀상'과 <친일 인명사전> 간행이다."
"네... <두만강>을 다시 읽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분위기가 잘 살아 있었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두만강>과 <화두>를 연결해서 분석하고 싶습니다.
특히 <화두>의 그 사회주의 선언 같은 문서상의 사건이 실제 벌어진다면...
우리 주변의 열강의 움직임으로 그 끝에 통일이 되면서
조명희의 선언 같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로마는 무너졌다.
소련이 무너졌으므로 그런 일은 없으리라 본다." (655p)
"사람은 기억 때문에 슬프다. 세상은 흘러가도 기억은 남는다.
(...) 슬픔은 영원히 남는다. 그렇게 만드는 힘이 기억인데,
그 마찬가지 인간의 힘이 그 슬픔을 이기게도 한다."
- <화두> 1부에서 (697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