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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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n차 인생 이야기가 인기를 끌고 있어요.

현실은 한 번뿐인 인생인지라 가상 세계에서라도 새로운 회차를 살고 싶다는 바람이겠지요. 드라마나 영화 속 n차 인생은 대부분 이전보다 멋진 경우가 많아요. 과거에 누리지 못했던 부와 권력을 쥐게 된 주인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위화 소설의 주인공은 정반대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혀 생각도 못했던 감정을 일깨우네요.

살면서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믿었던 마음이 부서지는 거라고 말할 거예요. 좋았다가도 싫어지고, 가깝다가도 멀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지만 믿음은 시간과 함께 조금씩 단단하게 채워지는 것이라서 한번 깨지면 회복되기가 힘든 것 같아요.

주인공 린샹푸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도련님인데,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아홉 살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난 뒤 집사 톈다와 텐다의 네 동생과 함께 살았어요. 어머니 생전에 아들의 혼사를 준비했으나 마땅한 혼처를 찾지 못한 채 가셔서, 린샹푸는 성실하게 일만 하면 지냈어요. 매파가 여러 차례 찾아와 신붓감을 소개했는데, 딱 한번은 예쁘장한 류씨 아가씨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매파가 농아로 착각해서 거절하는 바람에 혼기를 놓쳤어요. 스물네 살이 된 린샹푸에게 젊은 남녀 한 쌍이 찾아와 며칠 머물게 되었고, 둘 사이가 남매라는 걸 알게 됐어요. 여동생은 샤오메이, 오빠는 아창인데 생김새가 달라 전혀 남매 같지 않았어요. 멀쩡하던 샤오메이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더니, 오빠 아창은 급히 경성에 가야 한다면서 린샹푸에게 여동생을 부탁하고 떠났어요. 그 뒤는, 이미 예상가능한 전개였어요. 아창이 떠나고 샤오메이는 갑자기 건강을 되찾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 핑크빛 기류가 흐르더니, 우박이 마구 떨어지는 겨울밤에 드디어 통하게 되었어요. 린샹푸의 행복도 잠시, 샤오메이는 린씨 집안 대대로 모아온 금괴의 절반을 챙겨 사라졌어요. 실의에 빠진 린샹푸는 오직 작업실에서 목공 일을 배우며 지냈어요. 인생에서 화복을 예측하기란 어려우나 기술이 있으면 재앙을 복으로 돌릴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렸기 때문이에요. 해가 바뀐 어느날, 어제 있던 사람마냥 샤오메이가 돌아왔어요. 린샹푸는 몹시 화가 났지만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샤오메이를 내칠 순 없었어요. 샤오메이는 린샹푸의 아들을 낳기를 원했지만 딸을 낳은 뒤 다시 떠났어요. 이번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어요. 아니, 린샹푸의 마음을 송두리째 가져갔죠. 그래서 린샹푸는 젖먹이 딸을 데리고 샤오메이가 고향이라고 했던 원청으로 향했어요. 절망에 빠져 미지의 도시 원청을 찾아 헤매는 린샹푸,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어요.

산산이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어졌던 마음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요. 잔인한 운명을 탓하며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 린샹푸는 희망을 놓지 않았어요. 위화 작가님은 다른 소설과는 달리 《원청》을 집필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그만큼 린샹푸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졌어요. 린샹푸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 초기 무렵인데, 저자는 한국어 서문에서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 ... 저는 그런 난세 속 대한제국에도 《원청》 같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시대는 바뀌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네요. 잠깐의 희열이나 대리만족으로 끝나는 이야기 대신 당신의 이야기, 이제 써내려가야 할 때라고 말이죠.



"여기는 원청文城입니까?"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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