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유토피아 - 에덴의 기억이나 예감이 없다면 숨을 쉬는 것도 형벌이다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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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토피아》 는 에밀 시오랑의 책이에요.

우선 작가에 대한 소개가 필요한 것 같아요. 에밀 시오랑은 1911년 카르파티아 산맥 작은 마을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났고, 당시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에 속해 있었는데 아버지가 조국이 헝가리화되는 걸 저항하는 의미로 자식들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철학과에 입학한 시오랑은 그때 불면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고 하네요.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사유한 모든 것을 프랑스어로 옮겨놓은 허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라고 해요.


"빌려 쓰는 남의 언어 프랑스어와 씨름했던 지난 시간은 악몽이었습니다.

... 나 같은 스키타이족이 어떻게 거기에 적응해서 

정확한 의미와 관념들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 불행하게도 돌아서기에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국어를 버리지 않았겠지요.

신선한 것과 썩어가는 것의 냄새, 햇살과 진흙, 추한 슬픔, 

당당한 상스러움이 있는 루마니아어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선택해야 했던 언어가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쏟은 노력이 인질입니다." (14-15p)


이 책은 멀리 있는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되는데, 저자의 고백처럼 느껴지네요. 서유럽의 복잡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저자가 느끼는 고통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사유하는 존재인 자신을 우연히 병에 걸린 환자 혹은 문명인들 틈에 있는 침입자로 인식하고 있어요. 1950년대 후반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2022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더 소름끼치는 부분이에요. 러시아는 이미 차지하고 있는 넓은 공간을 명분으로 영토 확장 계획을 변명한다는 저자의 지적이 예리하네요. "충분히 가지고 있는 바에야 넘치게 갖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70p) 그들의 선언과 침묵이 담고 있는 무언의 역설이라는 것. 러시아는 우리가 사는 역사적 순간의 어둠을 수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라라고 표현했는데, 현재 러시아가 저지른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전 세계를 신냉전 시대로 몰고 갔어요.

욕망이 넘치는 세상에 사는 한, 사소한 악덕들이 훌륭한 미덕보다 효율이 높은 법, 행위가 지배하고 역동성이 지배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들의 정치적 측면이라는 것. 자신을 안다는 것은 행위의 저질적 동기를 아는 것이고, 본성에 새겨진 고백할 수 없는 것들을 아는 것이며, 우리의 생산성을 좌우하는 단점을 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네요.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다면 유토피아는 부질없는 환상인 거예요. 저자의 고통과 혼란 그리고 회의주의는 깊이 상처받은 영혼의 사디즘이에요. 그 상처를 들여다볼수록 우리가 해방되지 못한 존재라는 조건을 떠올리게 되고, 반복되는 역사를 지켜보게 되네요. 유토피아와 세계 종말의 개념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 영향을 주며 이어져 왔고, 우리를 위협하는 현실을 반영하기에 적절한 도구이기도 해요. 그러나 우리의 불행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해요. 헛된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인 거죠.


"국민을 어떻게 보는가?" 

아이러니를 섞지 않고 국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상가나 역사가는 자격미달이다.

국민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역사적 사건들과 통치자의 망상을 감내하는 것이다.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괴롭히는 계획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 국민이 누리는 단 하나의 사치가 혁명이다." (88-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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