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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정세랑 외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평점 :
옛날에 '행운의 편지'가 유행했던 적이 있어요. 누가 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붙여진 이름과는 달리 벌칙처럼 편지의 내용을 똑같이 적어서 일곱 명에게 편지를 보내야 하는데 이를 어기면 행운 대신 불행이 찾아온다고 했죠. 제 기억에는 귀찮아서인지 반항심 때문인지 그 편지를 읽기만 했던 것 같아요. 굳이 남이 쓴 내용을 옮겨 적어야 하나, 나는 싫소, 그러니 끝.
그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편지를 많이 쓰던 시절이었는데, '행운의 편지'는 왠지 골탕 먹이려는 의도가 보여서 자체적으로 폐기했었죠. 하지만 오랜만에 '행운의 편지'라는 책 제목을 보니 반가웠어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라니,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라나.
와우, 신선해요.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언니들, 그들이 서로에게 전하는 이야기예요. 물론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과거의 그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진짜 진심을 담은 내용이에요. 소설가 정세랑, 음악감독 김인영, 배우 손수현, 뮤지션 이 랑,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퀴어 퍼포먼스 아티스트 이반지하, 작가 하미나, 작가 김소영, 미술가 니키 리, 만화가 김정연, 시인 문보영, 작가 김겨울, 작가 임지은, 유튜브 크리에이터 이 연, 시인 유진목, 뮤지션 오지은, 여성학자 정희진, 다큐멘터리 감독 김일란, 기자 김효은, 작가 김혼비.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성껏 적은 이유는 얼굴은 본 적 없지만 목소리는 들었기에 나름의 친밀감을 표현하고 싶어서예요.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이야기가 비록 나를 향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공감했고 좋았으므로, 이렇게 혼자 끄적이는 글을 대신하여 답장하려고요.
나는 '여자'를 외치면서도, 내가 '여자'인 걸 싫어하고,
'여자'를 잃지 못하면서, 동시에 '여자'가 되는 길을 다
망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인
'나'라는 인간입니다.
- 이반지하 (68p)
이 문장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고, 신기했어요. 왜냐하면 지금은 '여자'라서 싫지 않고, '여자'를 잃어도 괜찮다고 여길 정도로 '여자'로 사는 것에 익숙해졌으니까요. 이제는 '여자'에 얽매이지 않아요. 뭘 망치고 싶은 충동도 없어요. 살아가는 거지, '나'로서 사는 거라고 받아들였거든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좀 더디고 많이 돌아온 듯 하지만 괜찮아요. 개성 넘치는 그녀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문득 나는 어떤 언니였나를 돌아보았네요. 그럴 듯한 수식어를 찾지 못한 '언니', 그냥 언니로 살고 있지만 별 불만은 없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언니'라는 호칭보다 제 이름, 누구 씨로 불리는 게 더 좋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말할 기회가 없었던 거죠. 왜 그랬을까요. 이 책을 읽다가 불쑥 말하고 싶었어요. 언니 말고 OO씨라고 불러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