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 : 내 안의 참나를 만나는 가장 빠른 길 요가 수트라 1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태일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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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의 책, 정말 오랜만이네요.

1991년 그의 우화 모음집 '배꼽'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도 철학, 명상 열풍이 일었더랬죠.

아마 그즈음 인도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던 것 같아요. 구루를 만나기 위해, 삶의 의미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제 우리는 머나먼 인도를 가지 않아도, 여기 이 책을 통해 내 안의 참나를 만날 수 있어요.

《비움》 은 오쇼 필수 명상서이자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를 새롭게 재해석한 첫 번째 책으로 '오쇼 수트라'라고 하네요.

우선 파탄잘리는 힌두교의 정통 육파철학 중 하나인 요가 학파의 창시자이며 『요가 수트라』는 라자 요가('왕의 요가'라고 해석됨)의 수행과 관련된 가르침을 담고 있는 힌두 경전으로 파탄잘리가 편찬자로 알려져 있어요. 일반인들에게 요가는 기묘한 동작으로 유연성을 키우는 운동법으로 비쳐지지만 원래 요가(yoga)는 고대 인도에서 널리 행해진 종교적 실천법이자 명상법이 오늘날 심신 건강법으로 응용되고 있는 거예요.

이 책은 오쇼가 이끄는 요가의 길 입문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가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어서, 배우는 사람으로서 밑줄을 그어가며 의미를 곱씹었어요. 완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히 알 수 있어서 말 자체로 받아들였어요. 그러나 뜻을 이해하려면 요가의 8단계를 수행해야만 해요. 야마, 니야마, 아사나, 프라나야마, 프라티아하라, 다라나, 디아나, 사마디까지 여덟 단계를 순차적으로 해야 하므로 '단계'라 하고, 유기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수족'이라 한대요. 아무 데서나 시작하면 안 되고, 야마, 즉 금계에서 시작해야 해요. 금계는 나와 타자를 이어주는 다리이자 생활의 절제를 의미해요. 나와 타자 사이의 일은 깨어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해요. 기계적인 반응은 꼭 필요할 때만 하고, 기계적인 반응이 깨어 있는 반응이 되도록 노력하며 의식을 점점 깨우는 거예요. 사람들은 누가 자기 욕을 하면 즉각적으로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때 금계의 사람은 상대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한대요. 여기 소개된 구제프의 일화는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구제프가 아홉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은 증조할아버지가 물려준 것으로 평생 보물처럼 간직해온 것이니 미래를 위해 꼭 기억해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대요. 그건 바로 "누가 너를 욕하거든 꼭 24시간 후에 답을 하라." (431p)는 것인데, 할아버지의 약속을 지킨 덕분에 구제프는 분노를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서서히 사라졌고, 이 시대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되었다고 해요.

우리도 분노, 시기, 증오를 내려놓고 순수한 존재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내면의 추한 부분을 억지로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 대신 변형시킬 수는 있어요. 우리는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꿀 수 있어요. 분노와 슬픔이 일어날 때 고요히 앉아 슬픔이 행복 쪽으로 이동하도록 설득할 수 있어요.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깨어 있으면 돼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아요. 슬픔이 행복으로 변형되는 날, 요기가 태어난다고, 그러니 그전에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네요. 이제 요가를 수행할 때예요.




요가는 '내면으로 들어가기'다. 180도의 방향전환이다.

마음이 미래로 가지 않고 과거로 가지 않으면 이제 내면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의 참 존재는 지금 여기에 있지 미래나 과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실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려면 마음도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 파탄잘리의 첫 번째 수트라는 지금 여기의 순간을 가리킨다.

첫 번째 수트라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유념해야 될 것이 있다. 먼저 요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요가는 힌두교도 아니고 이슬람교도 아니다. 요가는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처럼 순수과학이다. ... 요가는 힌두교의 것이 아니다. 요가는 내면의 수학이다.

... 세상 종교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세상 종교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믿음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슬람교의 믿음이 다르고 힌두교의 믿음이 다르며 기독교의 믿음이 다르다. 유일한 차이는 믿음뿐이다. 요가는 믿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요가는 무엇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느다. 요가는 체험을 이야기한다. 과학이 실험을 이야기하듯 요가는 체험을 이야기한다. 체험은 내면의 실험이다.

다음으로, 요가는 존재와 체험과 실험의 길이다. 이점 또한 명심하라.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없다. 뛰어들 용기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부족하다. 사람들은 아무것이나 쉽게 믿어버린다. 그렇게 해서는 삶의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이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피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인간의 존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변용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옷과 같다. 본질적인 변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예전과 변함이 없다. 벗고 싶으면 언제든지 벗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요가는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요가는 쉽지 않다. 요가는 존재론적인 접근이다. 사람이 진리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깨우침을 통해서이다. 자신의 존재가 송두리째 변해야 하는 것이다. 요가의 길에서는 인생관, 생활 패턴, 마음과 정신 등이 모두 산산조각 날 수 있다. 그런 다음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 새로운 무언가를 통해 진리와 만난다. 그래서 요가는 죽음이자 거듭남이다. 지금의 모습이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새로운 무언가가 내면에 감춰져 있다. 또한 요가는 철학이 아니다. 말하노니, 요가는 종교도 아니요 철학도 아니다. 요가는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가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삶이 고통스럽고 괴로우며 미치고 싶고 자살하고 싶어지면 갑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요가를 수행할 때이다."라고 파탄잘리는 말한다. 이런 순간에만 인간은 요가의 과학을, 요가의 수행을 이해할 수 있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요가는 마음을 멈추는 것이다.

마음이 없는 곳에서 요가가 시작된다. 마음이 있는 곳에서 요가는 사라진다.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고 한다 해도 마음이 계속 움직이면, 생각을 계속하면 그것은 요가가 아니다. 요가는 무심의 경지이다. 특별한 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마음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는 완벽한 요기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것을 잘 이해해야 된다. 생각이 일어나면 인간이 존재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사라질 때, 마음에 구름이 끼지 않을 때 인간의 존재가 푸른 하늘과 같이 드러난다. 존재는 항상 거기 있었다. 생각의 구름이 덮고 있을 뿐이다.

파탄잘리는 말한다. "보라!"

마음이 지나가도록 놔두고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그냥 놔두라. 그냥 보기만 하라. 끼어들지 말라. 마치 나하고 마음하고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나는 마음이 아닌 것처럼, 그 마음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끼어들지 말고 구경하라, 지켜보라. 관심을 두지 마라! 그냥 보고 있어라, 마음이 흘러가도록. 마음은 과거에서 오는 관성에 의해 흘러가게 되어 있다. 사실 마음이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 마음에 계속 기름(관심)을 붓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거기에서 힘을 얻는다. 이제부터는 마음에 기름을 붓지 말고 지켜보라.

(14-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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