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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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테이프 세대라면 <영웅본색>과 같은 홍콩 느와르 영화를 기억할 거예요.

수백 발의 총탄이 난무하는 총격 신을 보면서 그냥 신기했던 것 같아요. 암흑가의 보스라니, 우리에겐 비현실적인 세계였기에 영화 속 혈투 장면도 전혀 무섭거나 끔찍하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문득 이 소설을 읽다가 그때 그 시절의 영화가 떠오르면서, '아, 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었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어요. 저들은 왜 서로에게 총을 겨누며 싸우는 건지, 지극히 근본적인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

만약 이 소설도 똑같이 비디오테이프를 보던 시절에 읽었다면 흥미롭게 소비했을 거예요. 할아버지의 죽음을 추적하는 손자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로서 말이죠. 태어날 때부터 도깨비불을 봤다는 할아버지는 전쟁에서도 도깨비불 덕분에 살았다면서 도깨비불을 모시는 사당까지 만든 독특한 인물이에요. 주인공 예치우성은 타이베이 고등중학에 다니는 열일곱 살 소년이며, 치우성을 통해 할아버지 예준린과 주변 사람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장제스가 죽은 그 해, 할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걸 처음 발견한 사람이 치우성이에요.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치우성은 늘 머릿속에 욕조 물에 잠겨 있던 할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었고, 그즈음 유령이 보이기 시작했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돼요.

열일곱 살의 치우성이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 되기까지 살인범을 좇는 여정 속에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대만의 시대적 배경과 일상의 모습이 담겨 있어요. 신기한 건 이 소설 전에는 대만의 역사를 전혀 몰랐는데 치우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근현대사와 겹쳐지면서 일본과 전쟁이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했다는 거예요. 비슷한 역사는 아픔과 공감의 결이 같아지는 것 같아요.

'누가 할아버지를 죽였는가?'로 시작하여 할아버지가 죽인 사람들 그리고 전쟁과 보복이라는 끔찍한 비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늘 독일제 모제르 권총을 손질하며 때를 기다렸던 할아버지에게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거예요. 대만으로 건너온 중국인들의 삶을 보더라도 깡패무리의 다툼이 끊이질 않고, 치우성 역시 동급생끼리 홍콩 느와르 영화 같은 칼부림, 폭력이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우리나라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의 액션을 상상하면 될 것 같아요.

여기서 눈에 띄는 인물은 레이웨이예요. 치우성이랑 맞짱을 뜨게 된 불량 학생 사이의 보스 같은 존재인데, 우연히 군대에서 만나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다가 시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요. 주먹질을 하던 녀석이 시인이 된 거예요. 레이웨이의 심경을 변화시킨 왕쉬안의 시 <물고기가 묻다 (魚問)> 일부가 이 소설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어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역사는 흘러가고, 우리 삶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

《류 流》 는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소설이며, "20년만에 한 번 나올 만한 걸작"이라는 최고의 호평을 받으며 2015년 제153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요. 딱딱하다 못해 묵직해질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미스터리 스릴러적 요소와 완벽하게 결합시켰다는 점이 놀라워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걸 불현듯 깨닫게 해준 작품이네요. 저자는 1968년 대만 태생으로 다섯 살까지 타이베이에서 지낸 후 아홉 살 때 일본으로 왔고, 그때부터 후쿠오카 현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대요.

"이야기에 땀과 피 냄새가 나고, 문장 행간에서 작가의 즐거움과 고통, 슬픔의 시가 들리는 작품이 좋습니다."

"영상이 떠오르는 글은 쓰기 쉬워요. 내게 문제는 음악이 들리는 글을 쓸 수 있는지죠. 체취가 나는 문장, 피의 양상을 띤 한마디, 세계를 짓밟는 듯한 구두점.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죠." (482p)



"그의 눈에 일본 통치 시절을 그리워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박힌 배신자로 보였겠죠.

그건 오스트리아나 체코 사람들이 독일 노래를 부르며 나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수도 있으니까요."

"우서 사건을 아나?"

"네, 압니다."

1930년대 대만 선주민들이 일본 통치에 반대해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제일 먼저 파출소를 공격했고 약 140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었다. 총독부는 곧바로 군대와 경찰을 투입해 철저하게 무력 진압했다. 폭동을 진압한 후에도 일본인은 보복을 계속해 약 1,000명의 대만인이 살해당했다.

...

"할아버지는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요."

"우리가 일본을 그리워하는 것과 왠지 비슷하네요."

"네."

"자네 할아버지는 늘 화가 나 있었어요."

"가슴속에 아직 희망이 있었던 거죠."

"희망?"

"조바심과 초조함은 희망의 다른 얼굴이니까요."

위에 씨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냥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늘 모제르를 열심히 닦은 것이다.

그래서 리 할아버지나 구오 할아버지처럼 대만 생활에 적응하지도 않았고, 적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분노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자신을 늘 다그쳤다. 대륙을 떠날 때 멈췄던 할아버지의 시계는 대륙에 한 방 먹이기 전까지는 그대로 멈춰 있었던 것이다.

(188-190p)



"우연히 신문인지 어딘가에서 왕쉬안이라는 녀석의 시를 읽었어."

"물고기가 말했다. 나는 물속에 살아서 당신은 내 눈물을 볼 수 없어요.

내가 시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 그런데 아아, 그런 일도 있더라."

"고등학교 때 내가 왜 그렇게 거칠었는지 알 것 같더라. 우리는 자기 고통에만 민감해서 다른 사람도 같은 고통을 안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어. 네가 허벅지를 찔렀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찔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어. 물론 놀라기도 했어.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더라. 뭔가가 나를 쳤어. 그게 뭔지 늘 마음에 걸렸지. 그리고 이 시를 만났어. 아마도 우리는 다......"

"물속의 물고기였다, 그래?"

"응...... 한심하지."

"뭐." 나는 말했다. "하지만 좋은 시네."

"그래서 나도 시를 쓰기 시작했어."

... 문학은 때로 비겁하기 그지없고, 때로는 용감무쌍하다. 그런 문학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는 싸움과 흡사했다. 그 무렵 문학은 대부분 대륙에서 국민당과 함께 내려온 외성인의 것으로, 소재는 항일 전쟁이거나 공산당과의 전투를 그린 것밖에 없었다. ... 그런 시대에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러니까 본성인인 레이웨이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로운 시를 썼다.

(320-321p)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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