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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새로운 세상을 꿈꾼 25명의 20세기 한국사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5월
평점 :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소환한 스물다섯 명의 인물에 관한 책이에요.
이 책이 소개하는 스물다섯 명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건 바로 투옥이나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끝내 지키려 한 '삶의 원칙'이 있었다는 점이에요. 저마다 추구하는 목표는 달랐지만 자신이 세운 삶의 원칙과 그 가치들을 실천하기 위해 도전하고, 맞서 싸우며, 기꺼이 자신을 내던졌어요. 중요한 건 그들이 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하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백퍼센트 맞다고 볼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이기 때문이에요. 역사를 배운다는 건 사실의 나열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즉 올바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한때 국정 역사 교과서 논란이 벌어진 것도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내용을 포함시켰기 때문이에요. 이는 친일파 청산 실패의 역사가 계속 이어진 탓이에요.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이념 갈등을 조장했으니,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하고 잊혀졌던 거예요. 이 책에는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 3인(주세죽, 허정숙, 고명자)이 등장해요. 일개 여자라서, 기생 출신이라서 폄하된 독립운동가 정칠성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열혈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인물이에요. 그녀는 사회운동가로 변모했지만 세간에는 기생 출신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녔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향한 차별적인 시선이 있었대요. 심지어 50년이 지난 1978년 신문에도 정당한 평가 대신 기생으로 세평했다니 한심하네요. 반면 그녀는 대범하게 자신의 출신을 인정하며 세상에 힘껏 맞섰고 여성 사회주의 지도자가 되었어요.
"이 사회를 알고 또 이 사회에 대한 나의 지위와 의무를 깨달은 뒤부터는 생리적 조건 같은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 되었습니다. 여자라고 사내들이 할 일을 못 하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당면한 일은 사내가 더 잘하고 여자가 더 못하란 법이 없는 그런 엄숙한 일이외다. 그리고 돈이 있어 무얼 하며 또 없으면 어떠합니까. 모든 것은 우리 앞에 문젯거리가 아니 됩니다.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겠지요. 다만 피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뛰어들고야 말 그 일에 우리 몸을 바칠 생각만이 있을 뿐이겠지요."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삼천리>, 1929년 6월호) (31p)
한국 최초의 고공투쟁 노동자 강주룡은 식민지 조선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1960년생 김진숙은 유일하게 복직되지 않은 노동자로 살고 있어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은 노동자 해고와 임금 삭감에 항의하기 위해 85호 크레인에 오른지 129일째 되던 날,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매 숨졌고, 이에 흩어졌던 노조원들이 다시 모여 투쟁하자 정부와 한진중공업은 항복을 선언했는데 이때 단 한 명의 해고자 김진숙만 구제되지 않았어요. 김진숙은 85호 크레인에 다시 올랐고 유례가 없던 309일간의 고공농성으로 사측의 복직 약속을 받아냈으나 비열하게도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손해배상 소송으로 수십 억 원의 배상금을 요구했어요. 투쟁에 공감하는 전국의 시민들이 모여 만든 희망버스가 아무리 애써 모금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징벌적 배상금이라니 참으로 잔인하고 야만적이네요. 그럼에도 그녀의 투쟁은 계속 되었고, 37년 만인 2022년 3월 23일 김진숙의 명예복직이 이뤄졌어요.
"새로운 경영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단 한 명도 자르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도 울게 하지 마십시오. 하청 노동자들 차별하지 마시고 다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 복직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이념이 굳세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꿈을 꿨던 동지들의 상여를 메고 영도 바다가 넘실거리도록 울었던 그 눈물들을 배반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주십시오." (37년 만에 복직한 김진숙이 남긴 퇴직 인사 중에서) (127p)
이 책은 우리에게 역사책 너머, 숨겨진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불꽃처럼 살다간 이들을 보면서 기형적으로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의 줄기가 어떠한 뿌리에서 시작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네요. 이제는 진정한 역사의 승자가 누구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역사에서 불꽃처럼 맞서 싸운 이들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