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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이 ㅣ 특서 청소년문학 26
김영리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3월
평점 :
《팬이》는 멀지 않은 미래의 인간과 로봇의 이야기예요.
주인공은 로봇(로봇-5089)과 소년(워리, 지동운) 그리고 행위예술가(위술)예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셋이 만난 건 우연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운명 같기도 해요.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 고통을 느끼고 싶어하는 로봇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로봇이 되고 싶은 소년, 그리고 고통을 소재로 한 행위예술을 보여주는 노인은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어요. 리셋 아니면 파기!
로봇 개발자 고정준은 로봇을 만들 때마다 '로봇'이란 명칭 뒤에 숫자를 붙였어요. 로봇-5089는 5,089번째 만든 로봇이자 마지막 사전 테스트를 통과한 모델이에요. 정준은 로봇-5089의 성공 이후 아인사와 계약을 체결하여 아인1, 아인2 시리즈를 선보였고 현재 아인15가 출시를 앞두고 있어요. 아인 시리즈의 외관은 모두 선팅이 심하게 된 헬멧처럼 얼굴 앞면이 미끈해서 눈코입이 보이지 않아요. 누가봐도 인간에게 복종하는 로봇이라는 걸 보여주는 디자인이에요. 하지만 초창기에 만든 로봇-5089는 회백색 얼굴에 눈코입을 갖추고 있어서 인간의 표정을 가졌을뿐 아니라 뛰어난 작곡 실력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었지만 정체를 숨겨야 했어요. 대중들은 자신들이 즐겨 듣는 노래가 AI가 만든 것이라는 걸 아는 순간 외면했어요. 예술은 인간의 영역인데 AI가 침범했다고 느낀 거예요. 그 때문에 로봇-5089는 로봇계와 인간계에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어요. 올해로 만들어진 지 18년이 되었는데, 마치 열여덟 살 사춘기처럼 굴면서 스스로 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발적 리셋을 거부하고 있어요.
아인사 회장은 로봇-5089의 행동을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로봇 심리학자에게 의뢰했어요. 만약 끝까지 리셋을 거부한다면 파기될 수밖에 없어요. 정준에게 로봇은 다 제 자식 같지만 로봇-5089은 좀더 특별한 존재라서 파기하게 놔둘 수 없다고 강력 대응했고, 회장은 3개월의 시간을 줬어요.
참 이상한 것 같아요. 그냥 로봇으로 바라볼 때는 리셋이든 파기든 별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로봇-5089가 워리, 위술과 함께 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음악을 사랑해서 그 음악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다만 그 마음을 인간이 아닌 로봇이 가졌다는 게 문제인 거죠. 잔인한 인간들에 비하면 팬이는 진짜 따스한 마음을 지닌 존재로 느껴졌어요. 만약 로봇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다면 그 로봇의 활동을 로봇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약해도 되는 걸까요.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싱귤래러티(기술적 변곡점)가 온다면, 로봇이 로봇권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로봇-5089를 보면서 살짝 마음이 흔들렸어요.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인간성의 본질인 것 같아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특성, 그건 인간이라는 개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행동의 문제였어요. 그러니 경계해야 할 건 로봇이 아니라 인간성의 상실인 것 같아요.
"나에겐 고통이 꼭 필요해요."
"끝내 예술가가 되고 싶은 거야?"
"제 오랜 꿈이에요." (207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