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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는다 - 오감을 깨우는 클래식의 황홀, 듣는 즐거움으로 이끄는 11가지 음악 이야기
서영처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2월
평점 :
《가만히 듣는다》는 클래식 음악 에세이예요.
저자는 우리에게 음악과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기를 권하고 있어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어떻게 오감을 깨우는지 열한 가지 음악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고 있어요.
이 책은 클래식 음악을 마치 전시된 예술 작품처럼 세밀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요. 눈에 보이는 듯, 손에 잡힐 듯 묘사된 음악은 우리를 새로운 사색의 길로 이끌고 있어요. 음악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인간의 감정, 본능, 욕구에서 비롯된 예술의 근원적인 물음을 찾아가는 여정처럼 느껴졌어요.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에 나오는 아리아 '사랑의 죽음'과 라벨의 <볼레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등은 시각적 심상 이상으로 촉각적 상상력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음악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인물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헌신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사랑을 고수하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와서는 쾌락과 환희, 피할 수 없는 궁극의 운명을 격정적으로 노래한다." (39p)
작곡가의 상상력이야말로 창작의 원천인 것 같아요. 실존하지 않는 것들을 생생한 느낌과 감촉으로 표현함으로써 살아 있는 실체로 만들어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힘이겠지요. 음악은 청각적이지만 음악문자는 언어문자보다 더 시각적이라고 하는데, 책에 실린 미하일 글린카-발라키레프의 <종달새> 악보를 보면 오선 위에 12음역의 높낮이를 아르페지오로 표현하여 새가 솟구치고 곤두박질하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악보를 연주하는 건반 위의 손가락도 비상하는 날개짓으로 보일 것 같아요.
저자는 소월의 시를 읽다보면 대학 시절 작곡법 시간이 떠오른다고 해요. 당시 저자를 포함한 한두 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소월의 시에다 과제를 해왔는데, 그건 바로 소월의 시가 가지는 운율의 힘일 거예요. 소월의 시는 대부분 음악으로 작곡되었고, 만들어진 모든 노래가 명곡이 되어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어요. 어느 시인이 조수미가 부르는 소월의 <첫 치마>(김형주 작곡)를 꼭 한번 들어보라고 권했다는데, 저 역시 이번에 처음 들으면서 그 섬세하고 애잔한 울림에 뭉클해졌네요.
푸시킨의「눈보라」는 『벨킨 이야기』에 들어 있는 단편소설인데, 1964년 소련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어요. 스비리도프는 이 영화에 들어갈 아홉 개의 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 <로만스>는 사랑의 비극을 담은 암울하고 애절한 선율로 널리 알려졌어요. 한겨울에 이곡을 들으면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가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소름돋는 처연함이 있어요.
유태계 폴란드인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파괴된 문명의 잔해 속에 쇼팽 전문가를 등장시켜 극강의 감동을 그려내고 있어요. 스필만은 쇼팽 전문 연주가였지만 전쟁으로 몇 년째 피아노를 쳐본 적이 없었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졌어요. 빈 건물에 방치된 피아노를 연주하는 스필만, 그의 연주는 독일 장교의 마음까지 움직였어요. 실제로 스필만은 <녹턴 20번>을 쳤지만 감독은 역사성과 극적 효과를 위해 녹턴 대신 <발라드 1번>을 선택했다고 하네요. 인간의 영혼을 순식간에 꿰뚫고 훑어 내리는 것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감성이라는 것.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거예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와 <마왕>은 인생의 겨울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어떤 설명 없이 들어도 추위에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과 저항할 수 없는 마왕을 연상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한 것 같아요.
다양한 음악 이야기를 통해 클래식을 듣는 기쁨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앞으로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클래식 음악의 가치가 변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더 커진다면 모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