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용서하지 않을 권리
김태경 지음 / 웨일북 / 2022년 2월
평점 :
얼마 전부터 속으로 삼키는 말이 있어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괜찮아요?"라고 묻는 것.
그냥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려주면 될 일인데, 굳이 괜찮냐는 물음을 통해 괜찮음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파봐야 아픈 사람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데, 그건 아픈 순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세상에는 우리가 짐작도 못할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아픔의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공감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강력범죄 피해자들과 살인 사건의 유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미처 알지 못했어요.
저자 김태경 교수는 임상수사심리학자이며 서울동부스마일센터(강력범죄피해자 전문심리지원기관) 센터장으로 재직 중이라고 해요.
범죄 피해자들이 후유증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는 고된 과정을 돕기 위해 힘쓰고 있는데, 이 책 역시 범죄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오해와 편견, 피해자의 수사와 재판과정의 경험이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알림으로써 피해 회복을 위해 이웃인 우리가 해야 할 지침을 제안하고 있어요.
저자는 "잘못된 공감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79p)라는 인지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 박사의 경고에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강력범죄는 피해자에게 매우 생경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그 충격이 다양한 요인과 결합하여 상당히 복잡한 반응을 초래한다고 해요. 그 반응 중 일부는 피해자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양상을 띠기 때문에 주변에서 피해자의 경험을 넘겨짚거나 섣불리 조언하는 경우는 의도와 달리 2차 피해를 초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잘못된 공감은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잔혹할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과정 중에 피해자 간의 잘못된 공감에 따른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기본적인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고 있어요. 범죄 피해자라는 이유로 내가 다른 피해자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 내 생각이나 경험과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결정을 바꾸려 하지 말것, 나의 범죄 사건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경우 상대에게 허락을 받을 것, 다른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범죄 사건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경우 분명한 언어로 거절할 것, 그리고 모든 결정은 스스로 내리는 것이며 그 책임 또한 기꺼이 자신이 질 것 등 (79p)이 포함된다고 하네요.
강력범죄 피해자들은 사건만으로도 엄청난 트라우마인데, 사건 이후 고단한 수사 과정과 재판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고통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요. 그 과정들을 버텨내는 것도 힘들텐데, 재판이 끝나면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에요. 법원 판결 후 피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범인의 출소라고 해요. 출소한 범인의 보복 범죄라니, 너무나 화가 치밀어 오르네요. 그들을 확실하게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가 보안되어야 할 것 같아요.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이 있어요. 누구나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범죄의 영향은 피해 당사자에게 국한되지 않아서 가족과 지역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의 건강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어요. 경우에 따라 1차 피해보다 2차가 피해자에게 더 심각하고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해요. 피해자들의 삶을 뒤바꿔버림으로써 대인관계 부적응과 우울증, 성격장애, 자살, 재피해자화 등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를 3차 피해라고 불러요. 만약 우리가 피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를 모른 채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면 그 피해가 언젠가는 본인에게 돌아올 수 있어요. 피해자에게 주변의 지나친 관심은 위로가 아닌 경계 침범이나 관음증적 욕구의 결과로 해석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요. 진심어린 위로와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데, 그 내용이 책 속에 자세히 나와 있어요. 저자는 마지막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어요. 당신이 아직 범죄 피해를 당한 적이 없다면 그건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우리가 피해자 보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 누구도 범죄 피해에서 예외일 순 없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범죄 사건의 그늘에 가려진 피해자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적정한 시선과 태도로 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남의 일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일이니까요.
선생님, 제가 멀쩡할 때는 몇 가지 여쭤보려 합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어딘지 모르는 불안감은 나름 사라졌는데,
그 대신 제가 여기서 뭐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일할 때는 괜찮습니다. 근데 일 안 할 때는 '내가 어디 가는 거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항상 물음표가 생깁니다.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요. 이거 고칠 수 있는 건가요?
- 살인사건 유족의 진술에서 발췌 (61p)
진술 조사를 받을 때, 사건을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되게 힘들어서
중간에 화장실 가서 헛구역질을 했어요. 그래도 버텨보려고 감정을 차단하고
애써 침착하게 이야기했는데, 그게 조사하는 분한테는 이상해 보였는지
피해자답지 않다고 저를 막 혼냈어요.
- 성폭행 피해자의 진술에서 발췌 (108p)
가끔 다쳤던 곳이 아플 때마다 내가 범죄 피해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돼요.
샤워할 때 다쳤던 곳에 난 흉측한 흉터를 보면 사건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해요.
그렇다고 샤워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 폭행치상 피해자의 진술에서 발췌 (160-161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