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박완서 작가님은 소설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에요.

살면서 딱 한 번 뵌 적이 있어요. 지역 행사에서 잠시 사인회를 하러 오셨는데 긴 줄을 서 있다가 바로 앞에서 중단되는 바람에 허탈했는데,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다가가 조심스레 악수를 청했는데 흔쾌히 손을 잡아주셨어요. 마르고 버석한 손이 다소 서늘하게 느껴졌던 그 감촉이, '아, 내가 이 분을 정말 만나뵈었구나.'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줘서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책은 제 마음을 다시금 콩콩 두드렸어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박완서 작가님의 10주기를 기념하여 출간된 에세이집이며, "2021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어요.

1931년 10월 20일부터 2011년 1월 22일까지 출간된 책들, 산문 660여 편 가운데 베스트 35편을 선별하여, 표지 그림은 이규태 일러스트레이터의 말처럼 '눈이 오는 추운 날에도 마음속에 따스한 무지개가 그려지는' 느낌으로, 본문 그림은 우나리 일러스트레이터의 산뜻하고 명랑한 분위기가 담긴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어요.

한 장씩 넘기면서도 맛있는 사탕을 아끼느라 조금씩 녹이듯이,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어요. 

박완서 작가님은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작가"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여, 뭐라고 더 보탤 것이 없을 것 같아요. 

마흔 나이에 등단하여 수많은 작품을 쓰고도 평생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에요. 물 흐르듯 삶을 살아가고, 글을 통해 그 삶을 솔직하게 들려주었던 작가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래라저래라 강요하지 않는데도 자연스럽게 삶의 태도를 배우게 되네요. '이렇게 나이들어야지, 그래야 진짜 어른이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묵묵히 앞서 걸어간 어른의 모습,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뭉클해졌어요.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던 박완서 작가님은 추운 1월에 떠나셨네요. 낙엽지는 가을, 담장 안에 서 있는 살구나무 가지 끝의 잎들을 보며 '부끄럼 타듯이 살짝 붉어, 저 고은 빛깔을 무엇에 비할까.' 라며 바라보고 있는데, 딸이 "엄마, 저 살구나무 가장귀 좀 봐요. 꼭 복숭아 꽃물 든 손가락을 뻗쳐 들고 있는 것 같잖아요." (280p)라고 표현한 것이 절묘해 감동했다고 하셨죠. "누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 맛에 산다고 해도 될 것 같다."(281p)라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살구나무처럼 마지막까지 곱게 물들인 채 살고 싶어요. 어쩌면 이미 우리 곁에 아름드리 나무로 든든하게 지켜주고 계신 게 아닐까.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4년 전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다.  (216p)


...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인 소설 쓰기를 나는

한밤중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다.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광의 전기 스탠드가 있고,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라도 할라치면

여왕님이 팔자를 바꾸쟤도 안 바꿀 것 같이 행복해진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220-221p)  


내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247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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