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
정소연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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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소설인 줄 알았으나 에세이였던 책.

전업작가였으나 변호사가 되었고, 여전히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초대 대표로 일하면서 양쪽 세계를 오가는 저자.

그러니 이 책은 SF세계의 조물주이자 현실계의 변호사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예요.

먼저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들 중 가장 난처한 질문은 "사건 맡은 경험으로 소설을 쓰기도 하나요?" (13p)라고 해요.

법조인의 직업 윤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소 무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어요. 변호사로서의 경험이 창작 과정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타인의 민감한 분쟁 사건을 소설의 소재를 쓸 거라는 추측은 변호사를 모욕하는 일이죠. 세상에는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목소리가 커서 탈인 것 같아요. 상식 밖의 질문은 삼가해야죠.

솔직히 저자의 이력이 특이해서 더 관심이 간 것 맞지만 그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이 책은 저자가 전업 작가일 때부터 겸업 작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여러 지면에 쓴 칼럼, 수필, 해설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해요. 

주된 내용은 노동 변호사로서 마주한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이에요. 부당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만든 악당들에 대한 성토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17년차 직장인이던 남편이 전업주부가 된 사연은 눈물 겨워요. 구조 조정이라는 명목하에 부당해고 위기에 처했는데, 상급 조직이 없는 노동조합이라 소송해도 승산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거예요. 당시 저자가 맡고 있던 노동조합 사건이랑 똑같은 상황이 남편에게 벌어지고 있었던 거죠. 남편은 상의 끝에 투쟁하지 않기로 했고 사직서를 냈다고 해요. 그로부터 1년, 저자는 여전히 "안타깝지만", "혹시 노조가 없나요?" (19p) 같은 말을 하며 일하고 있다는 게 왠지 마음을 짠하게 했어요.

우리는 홀로 살아남을 수 없어요. '나'를 구원하려면 '우리'가 함께 힘을 합치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 사회에 불평등한 자원 가운데 남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권력을 으뜸으로 꼽은 저자의 생각에 이백퍼센트 동의해요. 


"글은 목소리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더 큰 권력이다."  (58p)


어떤 사람들은 온몸을 불사라도 세상에 한두 마디밖에 전달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시시콜콜한 취향까지 언론을 통해 널리 전파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그러니 목소리의 권력이 작은 사람은 말을 자꾸 줄여서 최대한 압축한 말, 즉 구호를 외치게 된다는 거죠. 아무리 중요한 말을 필사적으로 줄여 외쳐도 힘이 없기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니 안타깝고 답답할 따름이에요.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를 담은 이 책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비정규직 노동자와 산재 사망 사건의 피해자, 성소수자, 성범죄 피해자 등 우리 사회에 힘 없는 사람들의 외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해요. 한 사람의 힘은 미약하나 우리는 강하니까요.

온라인 유행어 중에 '웅앵웅 초키포키'라는 말이 있대요. 영화에서 대사 전달이 안되는 장면을 두고 만든 신조어인데, 요즘 정치인들의 사과가 딱 웅앵웅 초키포키더라고요. 개에게 사과를 건네는 사진을 올린 누군가처럼 웅앵웅 초키포키식으로 사과했다고 우기니 황당한 거죠. 사과해야 할 사람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서 되레 역정을 내는 기막힌 상황을 보니 부글부글 끓네요. 그러나 분노는 차가울수록 강력한 법. 이제는 냉정하게 사회를 바라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차별과 혐오는 틀린 것, 잘못된 것이니 과감하게 도려내야 해요. 지옥은 결국 우리가 만든 것이니, 바꿀 수 있는 것도 우리라는 걸 기억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한국 SF와 작품 해석에 관한 부분도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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