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를 보는 식물학자 - 식물의 사계에 새겨진 살인의 마지막 순간
마크 스펜서 지음, 김성훈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시체를 보는 식물학자>라는 책은 범죄 소설이 아닌 현직 법의식물학자의 이야기예요.

식물학자로서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던 저자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법의식물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됐다고 해요.

법의식물학자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삶일까요.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범죄과학은 대부분 드라마 CSI 에서 봤던 것들이라 몇 가지 단서와 증거들만으로도 척척 범인을 잡아낼 거라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범죄과학 수준이 드라마와 같다면 미제 사건은 한 건도 없을 테니까요.

오죽하면 노팅엄셔 경찰서의 웹사이트에는 "마이애미 CSI 와 달리 노팅엄셔 CSI 는 직접 증거를 분석하거나 범죄자를 체포하지 않습니다!"라고 적혀 있을까요.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인 거죠. 

현실의 범죄수사는 경찰대나 범죄 현장 수사팀, 범죄과학 서비스 제공업체에서 나온 전문가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복잡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고 해요. 저자는 범죄과학 서비스 제공업체에서 요청할 때만 하도급으로 일을 하는 프리랜서라는 것, 자체적으로 법의식물학자를 고용하는 범죄과학 서비스 제공업체를 본 적이 없대요. 

또한 저자가 아는 한 이 세상에 법의식물학 관련 자격증을 발급하는 곳은 없다고 해요. 능력 있는 법의식물학자로 보이고 싶다면 적어도 식물학 학사학위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는데, 영국에서 식물학 전공 과정이 개설된 대학을 찾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대요. 식물학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많고, 들어봤다고 해도 원예학과 같은 말인 줄 아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놀랐어요. 그러니 법의식물학자는 말할 것도 없는 거죠.  왜 이 책을 썼는지 짐작하는 대목이었어요.


저자는 평생 식물을 관찰하고 연구한지 45년이 넘어가는데 법의식물학자가 되어서는 배운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대요.

일반적으로 식물학자들은 식물 전체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한데, 범죄과학 세계에서는 현장에서 수집된 증거가 조각난 단편이 많고 오염되거나 훼손되어 있기 때문에 법의식물학자는 방대한 식물학적 경험을 토대로 조각난 식물의 정체를 추리해야만 하는 거예요. 드라마와는 달리 현실의 범죄과학은 화려하기는커녕 하루 종일 진흙투성이가 되는 고단한 일이라고 해요.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을 조사하는 일도 있지만 어딘가에 묻혀 있을 시신을 찾아 헤매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아마 이쯤에서 궁금할 거예요. 그토록 험하고 힘든 일인데 어떻게 적응했는지, 어떻게 범죄 현장에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는지 말이에요.

저자는 이 일을 하면서 희생자들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고 해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과 교감하려 하려고 노력한대요. 실수 없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은 따로 남겨놓지만 가끔 수색에 참여할 때 누군가를 찾지 못하는 순간에는 좌절한다고 해요. 어떤 심정일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나는 부패한 살과 뼈를 보며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공포는 범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분명 밤잠을 설치며 머릿속으로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 내가 하는 일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안겨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과 한 팀으로 일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흔들린 적도 있다. 

한 희생자가 가족 중 한 명과 놀라울 정도로 얼굴이 닮았던 것이다.

대단히 심란한 경험이었다."   (65p)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 식물 조각은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고, 법의식물학자는 범죄 현장에서 나온 그 조각을 통해 피해자의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식물은 가장 진실된 목격자라는 거예요. 범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경찰, 범죄 현장 수사관, 수색 고문, 범죄과학 영역의 전문가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공조해야 하는데 그 공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건 의외인 것 같아요. 저자는 법의식물학과 다른 법의환경학 분야들이 범죄수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려줌으로써 더 체계적인 연구와 훈련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어요. 법의식물학자가 들려주는 범죄과학의 세계, 그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아요. 새삼 존경스럽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