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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 - 낯선 곳에서 생각에 중독되다
김경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10월
평점 :
한때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했어요. 새롭고 낯선 장소가 주는 설렘을 즐겼기 때문이죠.
여전히 그 설렘은 좋지만 여행의 목적 내지 의미가 좀 바뀐 것 같아요. 외부로 향했던 관심이 점차 내면으로 기울어진 탓이 아닐까 싶어요.
똑같은 이유로, 누군가의 여행기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거라고 생각해요.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는 세계의 도시들을 거닐며 만나는 인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저자는 오랫동안 각종 현장을 누빈 언론인이며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인문학 칼럼으로 연재되고 공유된 적이 있다고 하네요.
'여행은 사유에 양념을 풍성하게 뿌려주는 기막힌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유럽, 미국과 일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그리고 우리나라의 여행지를 자신만의 사색과 인문학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어요.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낯선 도시의 예술과 역사, 문화를 떠올리며 사색할 수 있다는 것이 값진 시간인 것 같아요.
영국 리버풀에서는 비틀스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리버풀 머지 강가에 세워진 비틀스 동상 앞에서 <렛 잇 비>, <오블라디 오블라다>, <예스터데이> 등 수많은 명곡을 듣는다면 꽤 멋지겠지만 아쉬운 대로 책을 읽으며 감상했네요. 사실 리버풀보다 더 매력적인 곳은 코츠월드인 것 같아요. 사진만 봐도 왜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면서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알 수 있어요. 현대 정원의 개념을 만든 시인이자 건축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코츠월드에서 영감을 얻어 영국의 모든 건축물을 보존하자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전개했고 오늘날 역사적 유산을 온전하게 남기는 데 공헌을 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유럽의 명소들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고 아름다운 곳들이 많은 것 같아요.
스페인의 라만차는 돈키호테를 빼놓을 수 없는 곳이죠. 세르반테스는 광활한 라만차 평원을 바라보며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를 탄생시켰어요. 몇 년 전부터 스페인 정부가 만든 '돈키호테 순례길'이 산티아고 순례길 못지 않은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하네요. 돈키호테는 미친 늙은이가 아닌 미칠 만큼 열정적인 꿈 그 자체가 아닐까 싶어요. 한 번뿐인 인생, 돈키호테처럼 꿈에 미쳐 살아본다면 후회는 없겠지요.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굉장히 사랑했던 도시가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곳, 여기, 우리의 모습,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립으로부터 힘들게 떠났는데 다시 돌아오고야 마는 숙명적인 출발지, 그곳이 바로 프라하." (88p) 그가 남긴 단편「낯선 일상성」의 한 구절이라고 해요. 프라하는 누구라도 그 매력에 빠질 만한 도시인데, 카프카가 집필하던 작은 서재가 있다고 하니 더욱 가보고 싶네요.
저자는 겨울에 눈 내리는 월정사 숲길을 거닐며 벨기에 작가 마테를링크의『파랑새』속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되기도 하고, 법정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삶을 생각하며 내려놓지 못한 집착을 이야기하네요. 무엇보다도 월정사의 깨달음은 시인 박용열이 쓴「오대산 가는 길」에 담겨 있다고, 그 시를 조용히 읊조리며 가본 적 없는 그곳에 서 있는 듯 했네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결국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어요. 그러니 진정한 여행이란 갇힌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찬바람 불고 서리 오기 전에 어디로 갈까.
걸망 메고 망설이다가 홀로 눈감으니
바로 이 자리가 그 자리인 것을
내 어찌하여 그렇게도 몰랐을까" (292p)
